1편-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2장 [전체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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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작성일 24-01-04 13:00 조회 1,952 댓글 0본문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그렇다면 임진강 유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로의 역할을 한 것일까? 임진강 수계의 동쪽은 추가령구조곡이 형성되어있다. 추가령구조곡이란 광주산맥과 마식령산맥 사이의 서울-원산 사이에 발달되어있는 160km 정도의 좁고 긴 골짜기이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원산이 인접한 동해와 서울과 인접한 서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곡이로 경원선과 강원성 등의 철도가 현재는 부설되어 있으며, 용암대지로 유명한 철원, 평강 용암지대가 있다'
용암지대에 대해 첨언하자면, 신생대 제4기에 추가령 구조곡에서 지질적으로 약한 부분을 따라 지각이 갈라지며 열하분출한 용암이 철원-평강 지역에 이르는 대규모 화산 지형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철원 평야가 대표적인 곡창지대이지만, 근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임진강 유역의 거의 모든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1편’에서 언급했듯, 임진강은 주로 계곡 사이사이를 흐르다보니 충적지가 부족했고, 평평한 곳으로 나아간다 해도 단애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파주의 장단 지역이 거의 유일한 식량 생산 기지로서 역할을 했었다.
현재의 지리적 관점에서 임진강은 한반도를 북부와 남부로 나누는 기준이 되곤 하는데, 과거에는 대동강 문화권과 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유적이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연천 강내리유적과 연천 감곶리 취락 유적이다. 이를 통해 일찍이부터 한반도 남부와 북부 사이에는 철제기구와 같은 물질문화는 물론 문화적 교류도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동강 유역은 고대 한국 문화의 허브였다. 대동강 하구는 대동강과 재령강 등이 흘러들어오고 배후에 넓은 평야지대가 위치하고 있어 인구 부양력도 높았다.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대륙과 직접 연결되며 대륙의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는 거점지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동강 유역은 고조선 시기부터 통일신라 시기, 심지어는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의 주요 문화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연천과 철원지대를 비롯한 임진강 수계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임진강 기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평야가 분포한 해안가를 통해야만 한다. 동해와 서해 사이를 태백산맥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천과 철원 일대를 통하면 한강 유역인 서울을 거치지 않고 중부 내륙-북한강과 남한강 상류 지역-을 지나 남부 지방으로 갈 수 있는 내륙교통로의 관문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569, (2023.12.26.)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6%94%EA%B0%80%EB%A0%B9_%EA%B5%AC%EC%A1%B0%EA%B3%A1, (2023. 12. 24)
국내논문, 정동민, 「고구려 광개토왕대의 임진강, 한강유역 진출과 남방 접경」『한국 고대사 탐구』, 2022년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輯』, 2017년
사진자료
임진강 유역 <위키백과 2023.12.28.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A%B0%95,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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