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6장 [전체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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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작성일 24-01-05 14:33 조회 2,152 댓글 0본문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경우 ‘영락 6년 전쟁’, ‘장수왕의 남진정책 3편’ 등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간략히 정리만 하도록 하겠다. 4세기 후반부터 예성강 유역을 두고 고구려는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예성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서 한강 하구를 장악한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은 더 나아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함으로서 경기만에 대한 백제의 해상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직접 점유했는지는 학계에서 논쟁중이다.
임진강 유역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로 고구려가 덕진산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축조함으로서 완전한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주요 요충지였다. 고구려의 남방 방어선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전술한 것처럼 고구려의 한강 영유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임진강 유역은 고구려가 나제 연합군에게 밀려 한강유역을 완전히 빼앗기고, 이어 신라에게 낭비성마저 빼앗기면서 한탄강과 함께 신라를 막는 최일선 방어선이 되었다. 호로보루와 두루봉보루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영유했으며, 나당 전쟁에서 신라군의 주요 요충지이자 나당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당항성(현재의 화성 당성)을 대중국 교역 거점으로 활용한 점,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임진강 유역의 중요성이 백제나 고구려보다는 덜 했다. 그러나 당항진에서 연평도에 이르는 연안해로를 안전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 연안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진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강화도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수군이 활동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강 이남에는 신라시대 관방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칠중성이다. 칠중성은 연안지역을 방어하는 오두산성과 한탄강 유역의 육상 방어 지역을 연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이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칠중성에 산발적으로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칠중성 외에도 신라는 임진강 남안에 현성급의 작은 산성들을 촘촘하게 배치하여 부채살 형태의 방어체계를 구성하고 고구려의 주력을 임진강선에서 저지하려고 했다.
국력의 한계에 부딫혀 한강 유역으로의 재진출보다는 임진강 하구를 장악함으로서 경기만 제해권의 절반이라도 확보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의도와 예성강 이북으로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임진강변을 중심으로 북안에는 고구려 관방 유적이, 남쪽에는 신라의 유적이 대거 분포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輯』, 2017
국내논문, 박종서, 「고구려 장수왕대 한강유역 진출과 南進路 운영」, 『서울과 역사 113호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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