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임진강 3장[전체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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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작성일 24-01-23 13:00 조회 1,617 댓글 0본문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임진강 3장
-고구려의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고구려가 한성로를 사용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양주분지에서도 밀려나면서 그 지역의 보루군을 신라가 재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주방향으로 가는 기존 루트가 막힌 고구려는 점차 동쪽으로 남진 루트를 새로 뚫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7세기 초에는 포천 반월산성, 즉 낭비성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신라를 패권국가로 일으킨 신라 진평왕이 김유신 장군을 파견해 낭비성마저 빼앗기게 된 고구려는 포천을 지나 한탄강 유역까지 신라에게 내주어야 했고, 결국 고구려가 이전에 사용했던 거의 모든 남진로가 막히는 처지에 놓인다.
낭비성 전투 이후 고구려는 임진강과 한탄강 이북으로 물러나야 했고, 이때를 경계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은 임진강과 한탄강으로 확정되었다. 고구려는 강 북안의 덕진산성을 고수함으로써 임진강 방어체계를 완성했다.
고구려가 계속해서 임진강 방어선을 고집한 데에는 역시 한강 하구가 속한 경기만의 통제와 관련이 있다. 7세기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당항성을 설치하며 고구려는 신라와 해상권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임진강 유역에 진출하게 되면 최소한 경기만의 절반을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진강 하구 일대는 고구려로서는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고구려의 퇴각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설화로 유명한 ‘온달’이다. 비록 온달전은 설화적 성격이 강하지만, 일부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온달은 고구려가 나제 연합군에게 빼앗긴 조령-죽령지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침공하는데, 지금의 남한강 유역으로 파악된다.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고 하는데, 아단성의 위치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온달의 출정과 전사는 한강 유역 수복을 추구하였던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지향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자료
포천 반월산성(낭비성)과 파주 덕진산성, 임진강과 한탄강 <구글맵>
조령-죽령 지역 <구글맵>
아차산성의 위치 <구글맵>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837, (2023.12.25.)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輯』, 2017년
국내논문, 박종서, 「고구려 장수왕대 한강유역 진출과 南進路 운영」, 『서울과 역사 113호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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