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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3장 [전체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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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작성일 24-01-24 21:15 조회 1,0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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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3장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

 

신라는 온달의 침공을 아단성에서 막아내는데, 아단성은 현재의 아차산성으로 비정된다. 온달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로도 고구려는 603년에 재차 신라의 북한산성(아단성, 아차산성과 동일)을 공격하는데, 이에 대응하고자 신라 진평왕이 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넌다. 604년에는 치소를 남쪽으로 옮겼던 남천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재설치하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한강 이북지역 영역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6세기 후반 신라 관방 유적이 급증한다. 한강과 임진강을 연결하는 양주분지 입구에 있는 양주 대모산성도 이 시기에 석축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탄강에 인접한 연천 대전리 산성, 포천 성동리 산성에서 6세기 후반경 토기가 확인된다.

 

대전리산성은 나당전쟁의 최후 격전지인 매초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기도 하다. 한탄강에 인접한 성재산의 남서쪽 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하여 주변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한탄강과 전곡 일대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연천에서 한탄강을 건너 동두천-의정부-남양주-서울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교통로와 남동쪽의 포천으로 연결되는 고대 교통의 요지에 있다

 

성재산의 서쪽 지역에는 현무암의 침식으로 인한 단애가 형성되어 있어 자연적인 방어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동리 산성은 포천시 성동리 일대인 잣골 마을에 축조된 석축 산성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흔적이 모두 발견되는데, 백제와 신라가 가장 활발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 말기 궁예의 태봉국의 흔적도 발견된다.

 

임진강 유역에 있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는 파주 칠중성이다. 칠중성은 감악산 서쪽을 돌아 양주 분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은 임진강을 건너 장단과 평양으로, 남쪽으로는 양주를 거처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적성 지역이 요충지인 이유는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3에서 다루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아단성을 함락하는데 실패한 고구려는 기존에 이용하던 임진강-중랑천-북한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우회하여 공세 방향을 전환한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608년의 우명산성전투이다

 

우명산성은 현재 강원도 춘천으로 비정되는데, 고구려는 우명산성을 함락시킴으로서 북한강 유역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고-수전쟁에서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북부 접경지역으로 이동하며, 신라는 공격을 가해 춘천 일대를 수복한다.

 

그러나 백제가 623~628년에 연이어 신라를 침공하며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624년에는 경남 서부 일대로 비정되는 속함성速含城을 비롯한 6개의 성을 빼앗긴데다 백제 무왕이 한강 하류 고토 수복을 기치로 내걸고 웅진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백제의 위협과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한강 유역의 방어체계를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신라는 고구려의 새로운 남진로를 틀어막기 위해 한탄강-철원 지역으로 시선을 돌린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북진 이후 최초로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니, 그것이 바로 낭비성 전투이다.

 

사진자료

고구려남진.png

 

 

아차산성, 양주 대모산성 위치 + 고구려의 새로운 남진 루트와 우명산성

 

성동리산성.jpg

성동리산성, 대전리산성 위치 <경향신문,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100800021,>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searchCondition=&searchCondition2=&ccbaKdcd=23&ccbaAsno=02260000&ccbaCtcd=31&ccbaCpno=2333102260000&ccbaGcode=CA&ccbaBcode=03&ccbaMcode=02&culPageNo=37&header=div&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DivList.do&pageNo=1_1_3_0 (2023.12.27.)

디지털포천문화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pocheon/dir/GC05000913?category=%ED%91%9C%EC%A0%9C%EC%96%B4&depth=3&name=%EC%82%AC&type=titleKor&search=%EC%82%AC, (2023.12.27.)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4_0060_0370(2023.12.30.)

국내논문, 윤성호, 신라의 임진강 유역 친출과 대고구려 경계의 형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국내논문, 김강훈,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제138, 2020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이 게시물은 pajuwiki님에 의해 2024-03-22 15:08:09 파주지식공유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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