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분수원지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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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관장군묘 여충사 ,네이버지도 갈무리
고양시와 파주시 그리고 경기문화재단에서 의주길을 역사문화탐방로로 복원했다.
이 길은 삼송역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48km에 이르는 길로 조선시대 6대 간선도로 중 그 중요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명.청의 사신로로 이용되어 가장 활발하게 물자가 오간 곳이다. 영남대로가 인력의 왕래와 일본과의 교역에서 발전되었다면, 의주로는 물자와 연행로 그리고 서오릉, 파주삼릉, 장릉이 위치해 왕들의 능행이 활발하게 이뤄진 곳으로 그 격을 달리한다. 특히 효행의 근본을 실천한 영조가 파주의 소령원에만 12회, 정조가 2회 행행할 정도로 많은 능행이 이뤄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수되고 관리된 길이다.
그러던 이 길이 통일로와 자유로의 개통으로 이제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숙빈 최씨 소령원과 관련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문화재활동가 차문성씨는 오랫동안 이 옛길을 연구를 해 왔다. 그는 구파발(검암), 고양의 신원, 벽제관을 지나 혜음령을 넘어 지금의 용미리 석불이 있는 쌍불현에 이르는 길은 예전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주정소의 기능을 담당한 분수원에 이르는데 지금은 윤관장군 묘역이 있어 옛길을 정확히 위치비정 하기는 어려웠다. 임금의 행행 때는 주로 행궁에 머물지만 점심이나 차 혹은 의례를 행하기 위해 중간에 쉬어가는 장소를 주정소라 부른다. 현재 행궁을 제외한 주정소가 여러 군데 있지만 산업화의 물결로 확인되는 곳은 거의 없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분수원이 길의 건너편일지, 길의 안쪽인 윤관장군묘역 경내인지는 그 동안 알 수 없었다. 차씨는 의주로의 중요한 사적지인 분수원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윤관장군 묘역을 들렀지만 그 동안 심증은 갔지만 석재란 물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숙빈 최씨의 소령원 논문을 준비하면서 분수원의 석재가 일부 소령원의 석물(중배설석)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함은 물론, 장례 행렬이 서소문을 나와 신원과 분수원을 들렀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다시 한번 의주로의 중요한 분수령인 분수원을 찾아 나섰다.
석재를 혼자서 찾다 마침 윤관장군 묘역에서 윤상명 관장과 방복순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 분수원의 존재 가능성을 설명하자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조사에 합류했다.
이들이 함께 찾은 결과 분수원지의 단서를 발견했다. 바로 여충사의 뒷편 숲속 잡목으로 덮여있는 곳에서 건설 석재와 함께 섞여있는 옛 초석과 장대석을 발견한 것이다.
이들 석재들은 여충사를 1970년대 신축하면서 파 낸 돌인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흙과 나무에 묻혀 그동안 임금의 행행 때 이용하던 중요한 주정소인 분수원을 잊어왔던 것이다.
파주시에서 파견된 정상호 조사원은 강철 정의 사용이나 돌을 쪼개는 야질의 기법이 연대를 좀 더 내려가게 한다고 말한다.
특히 임금의 주정소 뜰에 깔던 박석은 이 분수원의 격을 더욱 높여 발굴을 하면 또 다른 건물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고양과 파주를 잇는 의주로의 탐방로 복원은 이제 힘을 얻은 셈이다.
길이란 점과 점을 연결하여 하나의 선을 만들고 그 속에서 과학, 역사, 문화, 민속, 환경이란 면적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옛길은 다른 어떤 길을 찾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글: 편집위원 차문성
출처 : HKBC환경방송(http://www.hkb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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