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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7장 [전체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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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464회 작성일 24-01-2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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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7장

- 662년 임진강 전투-

 

661년 당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평양성이 포위되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지만, 661년 말 신성新城에서 정명진이 이끄는 당군을 공격해 정명진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정명진은 당 건국기는 물론 6451차 고당전쟁, 655657658년 대고구려전에서 크게 활약한 무인이다.

 

신성에서 당군을 격파하며 병력에 여유가 생긴 고구려는 662년 정월에 당군을 사수에서 크게 격퇴했으며(사수전투) 뒤이어 당나라 군대에 보급품을 조달하고 퇴각중인 신라군에 수만에 이르는 추격부대를 파견한다

 

다시 신라군에는 대각간 김유신, 각간 김인문, 원효 등 신라의 최고위급 인사와 당의 웅진도독 유인원이 포진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들을 살획함으로서 신라와의 관계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고 웅진도독부를 무력화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김유신과 김인문, 원효는 신라의 정치, 군사, 외교, 종교 각개각층의 핵심 인물이며, 문무왕의 지지기반이었다. 만일 고구려가 이들을 살획한다면 단순히 문무왕의 지지기반을 몰락시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라를 지탱하는 핵심 역량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신속하게 김유신군의 예상 철군로에 매복을 하고 이들을 요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물리적인 시간과 군사전략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매복작전을 수행한 병력은 황해도 방어군과 임진강 유역의 보루군 병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김유신군의 예상 철군 경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김유신군을 발견하면 이를 저지 및 지연시키고 그 뒤에 추격하는 고구려의 정예경기병이 앞뒤로 포위선멸하는 것이 대략적인 고구려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꾀를 써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뿌리치는데, 소의 꼬리에 북을 매달아 계속 북을 치게 하고 땔감을 잔뜩 태워 자신들이 여전히 주둔지에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기만하고는 야간행군을 하여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뚫고 임진강 유역에 이르럿다.

 

신라의 기만작전에 당한 고구려군은 즉시 추격을 재개하였는데, 이미 신라군의 선봉은 임진강 도하에 성공해 남안의 언덕에서 대기중이었다. 하지만 후방 부대는 급히 도하를 하느라 전열히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이들을 손쉽게 격파한다.

 

고구려는 기세를 몰아 강 건너편의 신라군을 공격했으나, 김유신이 자연제방에 쇠뇌부대를 배치하여 만노로 집중사격을 개시하니, 도하작전으로 전열이 흐트러진 고구려군은 타격을 입고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을 일차적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한 김유신은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고구려 주력부대는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언제 이들이 다시 추격을 재개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신은 자국군대가 고구려군에 비해 기동성 면에서 매우 열세인 점, 선제적으로 고구려군의 퇴로를 장악하기 위해선 임진강의 단애로 이뤄진 자연제방을 고구려군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시간대에 도하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시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고구려군을 포위, 섬멸하여 1만 명을 사살하고 5천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그 요인으로는 첫째,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추격하다 격퇴당한 뒤 전열을 재정비하는데에 치중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군의 경계가 다소 허술해졌고, 이를 신라군이 적절히 이용했을 것이다.

 

둘째, 추격하는 역할을 맡았던 고구려군은 감히 신라군이 역공을 해올 것이라고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들을 여러 번 추격해 섬멸한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역공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강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주요 인사들을 무사히 귀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임진강을 안정적인 방어선으로 확고히 하였다. 신라의 임진강 전투 승리는 훗날 전개된 고구려 멸망전은 물론 나당 전쟁에서 신라가 임진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하여 승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국내논문,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우리 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100300&code=kc_age_10 (2023.12.28.)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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