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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4장 [전체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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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448회 작성일 24-01-0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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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연천 전곡리 유적이나 연천 강내리 유적에서 알 수 있듯 임진강변 파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임진강은 과거 칠중하七重河로도 불리었는데, 문헌상에는 칠중하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년 백제(온조왕 18)와 말갈 사이의 전투에서인데, 이를 통해 백제가 말갈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음을 알 수 있다. 말갈은 재지계 집단인 한맥과 북방에서 남하한 부여고구려계 유이민, 군현을 통해 유입된 중국계 유이민 등 다양한 집단이 뒤섞인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이 임진강 유역에 관방 체계를 수립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임진강 일대에 관방체계라 할 수 있는 유적들이 형성된 것은 백제가 등장한 이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역시 언제 임진강변에 처음 진출하였는지, 어떤 형태의 관방시설을 설치하였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백제가 국가로서 형태를 갖추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 경에 진출했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수곡성석현성.jpg 백제 수곡성, 석현성의 개략적 위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 포천 고모리산성이다. 고모리산성에서는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반에 이르는 백제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해당 시기에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은 알 수 있지만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문헌기록상 백제의 관방체계가 크게 발전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예성강을 넘어 평양으로 북진한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삼국사기에 석현성, 관미성, 수곡성 등과 같은 백제의 10여 개의 성들이 등장한다. 북쪽으로 크게 진출한 백제가 고구려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예성강 이북에서 임진강 북안에 이르기까지 관방시설을 구축한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틀어쥐어야만 남쪽에 있는 한강 하구의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임진강보다는 예성강 지역을 더 중시했고, 따라서 고구려를 임진강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 일대에서 방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에 뚜렷한 관방유적을 남긴 국가는 고구려와 신라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남진 시기까지는 임진강을 백제와의 완충 지대로 여겼다면, 장수왕이 본격적으로 남하해 한성을 함락한 시기부터는 남부전선의 후방 기지로서 임진강을 중시했다. 실제로 나제 연합군에게 한성 유역을 빼앗긴 뒤 고구려는 신라와 임진강을 경계로 다툼을 벌였는데, 칠중성이 대표적인 예시다. 임진강 북안은 이 시기부터 고구려 멸망때까지 고구려의 확고한 영역으로 남았다.


임진강관방시설.jpg

임진강 유역 주요 관방시설 <경향신문 2023.12.28-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100800021>

 

임진강 북안에 있는 고구려 관방시설 중 동파리보루, 두루봉 보루,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 1보루에서 고구려의 적갈색기와편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관방시설은 직선거리로 약 4~5의 간격을 이루고 있다. 호로고루나 당포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보루는 소규모임에도 권위건물의 상징인 기와 건물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임진강을 따라서 고구려의 경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신라는 7세기가 되어서야 한강유역을 장악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임진, 한탄강까지 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임진강 남안에 여러 성과 보루를 쌓아 관방체계를 구축했는데, 양주의 대모산성과 파주 칠충성, 연천 대전리산성, 오두산성 등이 이때 신라가 쌓거나 수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특이하게 임진강 강안보다는 그 배후에 위치한 구릉지에 산성을 축조했는데, 주로 한북정맥을 관통하는 교통로를 방어하는데 목적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중요 요충지로 떠오른 것이 칠중성인데, 칠중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오두산성, 봉서산성과 같은 해안 방어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한탄강 유역의 수철성, 대전리 산성 등 육상 방어 산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두 전선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7세기 전반경에 신라는 임진강과 한탄강 남안을 따라서 동서방향으로 연결되는 국경지대를 설정하고 그 통로에 위치한 구릉을 중심으로 산성을 배치하여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관방체계를 완성하였다. 이에 대한 지원을 위하여 북한산성에서 임진강 유역의 신라 산성까지 교통로를 따라서 부채살 형태의 종심방어선도 구축하였다.

 

 

참고문헌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 2017

국내논문, 신광철, 임진강 유역 점유 세력의 변천, 한국 고대사 탐구 41, 2022

국내논문, 윤성호, 신라의 임진강 유역 친출과 대고구려 경계의 형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우리역사넷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7_0020_0530, (2023.12.28.)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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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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