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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의 군사유적지 - 칠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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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685회 작성일 24-01-1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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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군사도로 및 군벙커가 설치된 칠중성,사진 문화재청

 

이 내용은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이  '임진강 스토리 공모' 를 후원하기 위해  투고한 '고대국가시기 임진강유역 관방 유적 체계'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적성면 구읍리에 위치한 칠중성(사적 437)은 중성산(重城山)에 위치하고 있다. 중성산(149m)은 감악산(675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로서 북쪽으로 임진강변에 이르기까지 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주월리와 가월리를 포함한 임진강 일대를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문산, 파주에서 전곡, 연천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와 개성, 장단에서 의정부, 서울로 들어갈 수 있는 349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특히 칠중성의 동북쪽 전방에 있는 가여울 또는 술탄이라 불리는 지점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중요하게 이용되던 교통로이다

 

삼국시대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여 난은별(難隱別)이라 했다가 고구려가 장악하고 난 이후 칠중성이라 하였으며 신라가 차지한 이후에도 칠중성현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757) 중성(重城)으로 고치고 래소군(來蘇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三國史記기록을 보면 삼국시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전투기록은 백제 온조왕 18(B.C 1)조로 말갈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서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땅속에 파묻어 죽였다고 한다

 

다음은 신라 진평왕 25(603) 8월 고구려가 장군 고승으로 하여금 말갈과 군사를 합쳐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자 왕이 친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를 막기위해 한수를 건너왔고 성 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질러 이에 호응하자 고승이 그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이어 선덕여왕 7(638) 10월 고구려가 신라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크게 놀라 대피하느라 소란하자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11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승리 하였다.

 

태종 무열왕 7(660) 11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군주를 비롯한 필부(匹夫)가 적을 막다가 전사 하였다. 삼국통일 후 신라와 당()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자 문무왕 14(674)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거란, 말갈과 더불어 칠중성을 포위 공격 하였다

 

다음해 2월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의 부흥군을 받아들이고 백제 옛 땅에 웅거한다 하여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이 성을 공격한 뒤 돌아갔으며 9월에 당병이 거란, 말갈병과 함께 쳐들어 와서 이 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때 소수 유동이 전사 하였다.

 

칠중성은 2001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 연구소에 의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에서 북쪽으로 8부 능선을 휘돌아 남쪽으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내려오다가 동쪽 부분에는 작은 계곡을 감싸안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라 할 수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약 600m 정도다. 현재 성 내부에는 군용 참호가 파여 있으며 참호의 벽면에서 많은 양의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와편 중 수키와는 아미성이나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유형의 당초무늬기와가 특징적이며 암키와편에는 사격자문, 집선문, 승석문 등 다양한 문양이 발견되었다

 

토기편은 대략 완이나 합을 비롯해 신라계의 유물이 주로 발견되는데 이것은 대략 신라 진평왕 25(603) 칠중성의 전투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확보한 이후 오래지않은 시점에 칠중성 지역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칠중성내에서는 백제계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이것은 이 일대가 백제의 영역이었을때 이 곳에 방어시설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소규모 성만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가 장악한 이후 정상부를 중심으로 보루형태의 방어시설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종 신라가 장악한 이후 현재 잔존하고 있는 규모의 석축이 구축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칠중성은 삼국 중 신라에 의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는 칠중성이 임진강 수계를 방어하는데 결코 양보 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윤희 - 임진강유역의 군사유적체계

 

  1. 총론
  2. 오두산성
  3. 덕진산성
  4. 이잔미성
  5. 칠중성
  6. 육계토성
  7. 임진진
  8. 장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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