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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4장 [전체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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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521회 작성일 24-01-2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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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4장

-낭비성 전투-

 

백제의 대공세,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626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백제와 고구려의 공세를 중단시켜줄 것을 요청한다. 당 태종은 이를 수락하고 고구려, 백제를 차례로 압박해 신라 공격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백제는 628년 신라의 가잠성공격에 실패한 뒤 632년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내홍을 겪으며 신라에 대한 공격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신라는 628년 고구려 낭비성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다. 낭비성도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포천의 반월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거로는 첫째, 6~7세기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대가 경기도 북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둘째, 반월산성 발굴 결과 고구려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면서 고구려가 반월산성을 관방시설로, 특히 당시에 급이 높은 건물들에만 사용했던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가 반월산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셋째, 지리적 관점으로는 반월산성이 남쪽으로 양주-중랑천을 경유해 북한산성으로 이어지기에 고구려나 신라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신라군이 동면東邊을 침공했다는 기사와 포천 지역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사가들은 포천 지역이 임진강, 한탄강 남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한탄강 동편을 동쪽 변경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신라군은 춘천 방면으로 통해 낭비성을 공격했다고 추정한다.

 

낭비성이 위치한 포천 지역은 남쪽으로 비득재, 축석령 등 고개를 통과하여 양주, 서울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영평천을 따라 연천으로 연결되며, 북쪽으로 한탄강을 건너 철원으로 통한다

 

양주 분지를 지키는 대모산성을 낭비성이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대모산성을 지나면 바로 북한산성(아차산성=아단성)이 있고, 그 너머에 한강 하류 지역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낭비성을 신라가 점령할 경우 임진강과 한탄강 남안 유역을 확고히 신라의 영토로 영역화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는 천연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신라의 고구려 공격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3개의 주공부대와 1개의 별동대를 동원했다. 주공부대는 김용춘 장군이 통할하며 낭비성을 공격하고, 별동부대는 비열홀주를 거쳐 고구려 동북부 변경을 공격해 고구려 증원부대가 낭비성으로 파견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는 신라군이 북한산성을 거쳐 북진해오자 임진강-한탄강 이북의 부대를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낭비성은 대규모 부대를 맞아 싸우기엔 부적합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야전을 택했다. 양군은 포천천 동편의 들판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초전은 신라군의 패배였다. 고구려군이 신라군의 경로에 함정을 파놓고 방어태세를 만반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군들은 두려워 싸울 의지를 상실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나선 것이 김유신 장군이다. 그는 홀로 고구려 적진으로 나아가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깃발을 빼앗아 왔으며, 이에 기세를 살린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들이쳐 승리를 거둔다. 고구려군은 5천 명이 도륙당하고 1천여 명이 사로잡혔으며, 낭비성의 고구려군이 1만이 넘는 신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엔 힘들다고 판단하여 낭비성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사진자료 

가잠성.jpg

가잠성 위치 + 대야성, 관산성 <구글맵>

 

낭비성임진강.jpg

낭비성의 위치와 한탄강, 임진강 지류 표기 <구글맵>

 

비열홀.jpg

비열홀주 위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B%9D%BC,>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203, (2023.12.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502(2023.12.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94(2023.12.30.)

- 국내논문, 김강훈,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제138, 2020

국내논문, 윤성호, 신라의 임진강 유역 친출과 대고구려 경계의 형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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