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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3장 [전체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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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477회 작성일 24-01-2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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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과 임진강 3장

-나당 전쟁의 전개-

 

오골성 전투를 시작으로 나당전쟁이 발발했다. 나당전쟁의 주요 전장은 황해도 이남-예성강 유역에서 임진강변으로 점차 이동한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충돌도 불사하고 비열홀 지역을 고수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5편에 낭비성 전투를 살펴보며 다룬 바 있다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는 부대를 주공부대 3개와 별동대 1개로 편성하고 별동대를 비열홀 지역으로 진출시켜 고구려 예비대를 후방에 묶어놓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입장에선 비열홀은 평양성과 일직선상에 위치하기 때문에 별동대를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오골성 전투로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신라는 비열홀 지역을 비롯한 원산만 일대를 장악한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신라의 영토이긴 했으나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평양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서북 방면에서는 6708월까지 안승과 같은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고 황해도 재령 인근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초기 나당전쟁의 주요 전선은 임진강변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황해도 남부와 예성강 유역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방어선은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672년에 일어난 석문전투이다. 석문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신라 연합군은 당나라 군대에 큰 패배를 당했고, 사실상 황해도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군 세력이 와해된다

 

신라는 이에 수세를 취하고 임진강-예성강 일대에 퍼져있는 산성들을 중심으로 소모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석문 전투를 기점으로 동북방면 신라 국경 역시 후방으로 이동한다. 비열홀주를 우수주(춘천)으로 이동시키는데, 이는 서부전선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크게 밀려난 상태에서 비열홀 지역이 당군 점령지로 크게 돌출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군은 동북방면 군단들의 측면이 당군에 의해 공격받거나, 최악의 경우 포위섬멸당하는 참사를 막기 위해 동북부 전선에서 전략적 후퇴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비열홀(안변) 지역은 나당전쟁이 마무리된 681년이 되어서야 신라에 수복된다.

 

그러나 석문 전투로 신라군이 완전히 임진강-한탄강 남안으로 철수했다고 단정짓긴 힘들다. 당나라는 여전히 우잠성(황해도 금천)이나 대양성(강원도 금강)과 같은 서북방전선 각지에 남아있는 신라, 고구려 부흥군 세력을 진압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신라는 예성강-강원도 북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종합해보면 초기 전황은 신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인다. 당군에게 서북부 지역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차례 빼았기면서 전선을 남쪽으로 물려야 했기 때문이다

 

러나 673년까지 파죽지세로 신라를 몰아붙이던 당나라 군대가 674년부터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추정컨대 672년부터 673년까지 신라군과 수십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벌이며 병력이 크게 소모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한숨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으나, 이때 당나라에서는 설인귀를 필두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고 있었다. 당나라 입장에서 신라가 고구려고지 일부와 예성강 유역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은 안동도호부를 비롯한 고구려 지역에 자국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군은 675석현성(개풍), 아달성(안협), 적목성(회양)등 신라 북변의 최전방 거점들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신라는 일련의 전투들로 예성강 유역을 당에게 빼앗기고 임진강 유역으로 퇴각하니, 당군의 다음 목표는 파주 임진강변 여울목을 통제하는 최후의 거점인 칠중성으로 정해졌다.

 

*본고에는 석현성이 황해도 개풍군에 위치한다고 표기되어 있는데, 필자는 이전까지 석현성을 계속해서 양주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해왔다

 

그렇기에 모순이 발생하는데, 일단 석현성의 위치 자체가 미상인데다 필자는 그 위치를 두고 논쟁할 아무런 권위가 없기 때문에 글을 작성하는데 참고한 자료들의 입장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는 사실을 주지해 주었으면 한다.

 

사진자료

비열홀.jpg

비열홀주

 

석문전투.jpg

석문전투 우잠성 대양성 <구글맵> 

 

석현아달적목.jpg

 

 

석현성, 아달성, 적목성 <구글맵>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564(2024.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564(2024.1.1.)

 국내논문, 권창혁, 나당전쟁 시기 매소성 전투와 신라의 북방전선,한국 고대사 연구 95, 2019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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