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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5장 [전체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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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604회 작성일 24-01-2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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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과 임진강 5장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나당 전쟁과 임진강’ 4편에서 매소성 전투는 당나라가 한반도 전역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 발생한 전투라는 점을 다루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서역에서의 정세 변화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당나라가 극적으로 서역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내지가 공격당한 6763월 이후이며,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이근행이 서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 역시 676년 말의 일이라는 점을 근거로 매소성 전투는 단순히 당군의 철수작전이라고 볼 수 없다.

 

매소성 전투가 당군의 철수 작전이 아니라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매소성 전투 직전에 발생한 천성 전투이다. 천성 전투는 현재 파주 오두산성에서 발생한 당군의 상륙작전이다

 

매소성 전투를 당군의 철수 작전으로 보는 측은 천성 전투가 당군의 보급부대가 본대에 보급을 위해 상륙을 감행했다가 신라군에게 패배했고, 이에 보급로가 단절된 매소성의 당군이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고 주장한다

오두산성.jpg

사진=파주 오두산성, 연천 대전리산성 <경향신문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100800021(2024.1.1.)>

 

천성전투에서 병선 40척과 戰馬 1,000필을 노획한 점으로 보아 설인귀 함대는 전마를 공급하던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즉 설인귀 함대가 한강 하구의 천성을 장악하여, 임진강 수계를 통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의 재보급을 보장하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임진강은 수심이 얕고 서해안의 간조와 만조의 영향을 받는 불안정한 수계이다. 당군이 천성을 장악하더라도 수로로는 적성積城 일대까지 밖에 이동할 수 없으며, 671년 물자를 실어나르는 배인 조선漕船을 탈취당한 경험이 있는 당군이 또다시 대규모 보급선단을 투입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보급부대가 후방으로 지원하지 않고 전투부대가 위치한 곳보다 더욱 위험한 곳으로 상륙을 감행하는 것은 군사전략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천성전투는 보급을 목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기록 그대로 당군이 대규모 상륙전을 감행한 것으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천성전투가 당군의 보급 작전이 아니라 상륙작전이었다면, 매소성의 당군이 무력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당나라와 신라간 매소성 전투는 왜 벌어진 것일까? 당나라는 674년의 소강기를 거쳐 675년에 대신라 전쟁을 속개했다

 

2월에는 칠중성을 공략하려다 실패했고, 이후 상륙부대를 파견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직접 타격하려 했으나 신라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그렇다면 당나라군이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는 지역은 딱 한 군데밖엔 남지 않는다. 바로 연천 대전리산성이 위치한 한탄강 상류 지역이다.

 

대전리산성은 한탄강 하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임진강 유역 최대의 요충지인 칠중성으로 접근이 편리하다. 육로를 따라 남하하면 한강 이북의 주요 거점인 양주와 북한산성北漢山城(아차산성, 아단성)과 이어진다. 이 일대는 임진강 중하류와 달리, 한탄강을 도보로 도섭渡涉하기 용이한 곳이다.

 

지루한 대치상태가 지속되다가 신라군이 매소성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에 공격을 가했고, 18차례의 전투를 통해 6천 명의 수급을 베고 3만 필에 달하는 전마를 획득했다

 

675년 초부터 지속적으로 전력이 소모된 당군은 결국 매소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한반도 북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소성 전투가 발생한 675년 이후인 676년에는 안동도호부가 평양에서 요동 지방으로 이동하기까지 한다. 이는 당나라가 대신라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해본다면, 6759월 당 원정군의 철수는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신라군의 격렬한 저항 및 그에 따른 손실누적·보급문제 등의 요소로 인해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였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서역정세라는 외부 요소에 의지한 당 측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전쟁을 방기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 시점에서 당 원정군은 서북방면 및 동북방면 양측에 걸친 신라의 북방전선 전체에 대한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공세를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어선을 돌파하여 신라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서 더 이상 고구려고지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본래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이다.

 

즉 다시 정리하자면, 우선 이 675년의 전투는 신라 입장에서 볼 때 나당전쟁 개전 초부터 고구려고지에 대한 진출·경략을 주된 목적으로 전개되었던 북방전선의 일환이었다

 

더 나아가 그로 인해 6752~9월의 기간 동안 예성강 유역~강원 북부에서부터 경기 북부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당 간의 치열한 소모전이 벌어졌으며,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한 당 원정군이 매소성에서 철수하면서 신라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국내논문, 이상훈, 나당전쟁기 매소성의 위치와 매소성 전역의 위상,한국 고대사탐구 41, 2022

 

 

국내논문, 권창혁, 나당전쟁 시기 매소성 전투와 신라의 북방전선,한국 고대사 연구 95, 2019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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