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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5장 [전체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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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2,313회 작성일 24-01-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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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백제를 중심으로-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1, 4에선 임진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항쟁과 관방 체계의 구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편에서는 한강 유역의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한강 유역으로 가는 통로로서의 임진강 유역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다분히 한성에 왕도를 두었던 백제의 입장에서 서술한 데다가 그 내용 역시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글을 필두로 백제, 고구려, 신라 순서대로 왜 임진강 유역이 그들에게 중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서영일은 백제가 임진강 라인보다 예성강 라인을 더 중시하였다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백제 근초고왕부터 아신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는 대부분 예성강 하구지역-현재의 연백평야(연안과 배천)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의 뚜렷한 관방시설인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의 성도 모두 예성강 남안에서 시작해 임진강 유역까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국남7성.png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축조한 국남7성 위치

 

 

황해도 배천 일대는 예성강 하구 서쪽의 연백평야 지역으로 교동도와 강화도를 마주하고 있고, 해주만으로 진입할 수 있는 서해 연안해로의 요충지이다.


그리고 예성강 하구는 한강 하구가 있는 경기만과 연결되고, 경기만은 서해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가 한성에서 한강 수로를 활용하여 서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예성강 하구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이 가시화된 4세기 무렵 양국은 오늘날의 황해도에 해당하는 대방 지역을 놓고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에 대해선 영락 6년 전쟁의 배경문서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간략히 다루자면,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하자 백제는 대방군에 원병을 파병하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고국원왕이 백제 북부 변경을 침공한다. 이에 대응해 근초고왕이 평양성까지 북진했으며, 고국원왕을 사살하며 황해도 남부 지역을 장악한다.


예성강 하구와 북안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백제가 생각할 수 있는 다음 방어선은 해서정맥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과 예성강을 동서로 갈라놓은 산줄기인 예성강 남안의 임진북예성남정맥 일대이다


예성강과 산맥이 거의 평행을 이루며 이중으로 천연적인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다. 예성강을 도강해 임진북예성남정맥의 험한 고갯길을 넘어야 개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데, 때문에 예성강 하구와 연결된 개성과 그 북방의 금천 지역이 가장 요충지였다.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이 임진강과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산줄기인 한북정맥의 산악지대다. 하지만 이 일대는 백제의 수도가 있던 한강 유역의 외곽지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이곳까지 진출하면 한성은 왕도로서 기능하기 어렵다. 실제로 광개토태왕이 예성강-임진강 연안의 백제 관방시설인 석현성 등 10성을 점령해 임진강 북안을 장악하자, 뒤이어 백제의 왕도는 고구려군의 군홧발에 짓밟혀야 했다.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4편에서 언급했듯, 임진강 유역에서 백제의 관방시설 유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아있는 유적들도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개시된 4세기 후반즈음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진한 고구려 역시 장수왕 이전까지는 임진강을 영역화하려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백제의 반격이 매우 거셋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4세기 후반 백제 정벌 후에 축조한 7개의 성이 예성강 북안에 위치한 것이 뒷받침해준다.

 

첨언

 

 

첨언 3문단에 석현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 성이 예성강 남안에서 시작해 임진강 유역까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되어있다. 석현성의 위치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 황해주 연백평야 일대라는 설, 양주 일대라는 설 등이 있다. ‘임진강유역의 전략적 중요성’2편에서첫 번째 이미지는 아래 참고문헌에 표기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기술에 따라 양주시로 표기했고, 본편에서는 역시 글을 작성하는데 참고한 서영일의 기술에 따라 임진강 유역으로 넓게 표기하였다.

 

사진자료

13정맥.jpg 백제의 방어선 역할을 한 한북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위치

 

남한의 주요정맥.jpg 위성사진으로 본 남한의 정맥들

 

참고 문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B%B0%A9%EA%B5%B0, (2023.12.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671, (2023.12.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654, (2023.12.25.)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07_0020_0530(2023.12.28.)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 2017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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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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