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광개토태왕의 6년전쟁 3장 [전체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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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6년전쟁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고구려에게 석현성을 빼앗기며 북부 관방시설이 붕괴된데 이어 관미성마저 빼앗기며 백제의 수도 한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다. 이에 아신왕은 군대를 편성하여 적극적으로 대고구려 반격 전쟁을 실시한다.
백제의 반격은 393년 관미성 공방전으로 막을 올린다. 하지만 백제는 관미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했고, 목표를 수곡성으로 변경하지만 광개토태왕이 직접 이끄는 5천의 기병대에게 철저히 분쇄되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공세를 막고자 백제와의 국경선에서 조금 뒤로 물러난 예성강 하구 일대에 7개의 성을 새로이 축조해 관방시설을 구축하였다.
이후로도 백제는 아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군과 패수가에서 격돌하였으나, 싸우는 족족 패배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의 반격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였다. 앞에서 볼 수 있듯 주요 전장이 패수, 즉 예성강 일대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역시 지속적인 백제의 반격으로 임진강변에서 약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제가 지속적으로 임진강변을 넘어 예성강 일대까지 진출하려 시도하자, 광개토태왕은 396년 새로운 공새를 계획, 실행한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이 직접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북부를 공략했다. 임진강변을 확고하게 자국 영토로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수군의 지원을 받아 한강을 도하, 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마저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아신왕은 항복을 하였고,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광개토태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더 남진하여 58성 700촌을 차지했는데, 이 범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임진강-한강 이북으로 보는 설, 예성강-경기 서해안으로 보는 설, 북한강 유역과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일시적 항복으로 위기를 모면한 아신왕은 다시 군대를 편성하여 고구려를 침공한다. 404년에는 왜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광개토태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거듭된 패전으로 백제에선 민심 이반이 일어나 백성들이 대거 신라로 도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대고구려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부딪혔으며, 고구려 역시 요동 지방에서 전진이 쇠퇴한 후 새롭게 일어선 후연을 견제하는데 신경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고구려-백제 전쟁은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군이 예성강 유역으로 철군했다고 나오는데, 거센 백제의 반격을 염두에 두고 임진강변을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국가 이전에는 국경이 명확한 선이라는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7개 성을 축조함으로서 자국 영토로 공고히한 예성강 유역으로 퇴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파주군지역사(파주군청 직원교육자료,1984년,윤일영 육사교수)
사진자료
국남 7성의 개략적인 위치 <구글맵, 소재 파악이 가능한 5개 성만 표기>
백제 풍납토성의 위치 <구글맵>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057
국내논문, 정동민, 「고구려 광개토왕대의 임진강, 한강유역 진출과 남방 접경」『한국 고대사 탐구』, 2022년
국내논문, 신광철, 「임진강 유역 점유 세력의 변천」,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년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이서진 역사학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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