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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임진강 2장[전체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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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1,567회 작성일 24-01-2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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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임진강 2장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

 

철저한 준비를 마친 장수왕은 자신이 직접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한다. 이때 공격에 활용한 루트는 이전 광개토태왕이 이용했던 길과 같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박종서는 이 길을 한성로또는 웅진로라고 명명하고 있다. 임진강과 파주를 거치는 주요 도로는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3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서 조금 더 세세하게 다뤄보도록 하겠다.

 

한성로는 평양에서 한성 방면 노선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주 공격로이다. 한성로는 평산에서 개성을 거치는 방면과 평산에서 연천으로 가는 방면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방면의 남진로는 적성에서 합류하는데, 이것이 임진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3에서 한강 유역에 남경이 설치되기 이전까지 주요 도로로 사용되었던, 과거 한강 유역의 중심지였던 강동 지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다만 금천-개성 방면으로 진출하려면 별도의 도강 장비가 필요했다. 평산에서 연천 방면으로 통하는 노선에 흐르는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은 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가여울이 이곳저곳에 분포해 있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는 임진나루, 과거에는 호로고루나 육계토성 앞의 가여울이었다.

 

임진강을 도강한 뒤엔 적성의 현재의 칠중성(장수왕 당시엔 축조되지 않았음)앞의 감악산 서로와 당포성을 지나 감악산 동로를 이용하는 노선이 있다. 이 두 노선은 양주 은현면 봉암리 일대에서 합류하는데, 이 일대에 위치한 보루가 태봉산보루이다.

 

태봉산 보루는 감악산을 통과하는 모든 경로를 감제, 통제할 수 있는 주요 요충지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 고구려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가 태봉산보루를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태봉산 보루를 지나면 양주분지에 이른다. 양주분지에 위치한 도락산, 불곡산 등의 보루군은 한성으로 가는 사패산,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보루군과 연결된다. 이 경로는 아마 고구려가 나제 연합군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에 후퇴하는 경로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강 유역의 아차산 보루군은 6세기 중엽, 양주지역의 여러 보루군은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까지 편년되기 때문이다.

 

한성로를 통해 남하한 장수왕의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으며, 개로왕을 주살하고 포로 8000급을 획득했다. 이때 고구려군이 계속해서 한강 유역에 머물며 영유했는지, 아니면 바로 고구려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여기선 따로 언급하지 않고, 글을 작성하는데 참고한 박종서의 입장, ‘한성 함락 후 일부 군대를 한성에 남겨 계속해서 남진을 시켰다.’를 기본 전제로 하겠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광개토태왕의 그것은 성질이 매우 다르다. 광개토태왕은 점령한 지역 대부분을 돌려주고 철수했고, 이후 백제가 다시 반격함으로서 전선이 다시 임진강 유역에 고착화되었다. 광개토태왕은 백제 정벌의 목적을 영역 확보가 아니라 고구려가 북쪽의 후연, 북위 등을 상대할 때 배후세력으로 백제가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은 한성을 함락시킨 뒤, 한성을 불태우고 백제의 귀족과 주민들을 잡아서 고구려 내지로 이주시켰다. 이는 장수왕의 한성 침공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제를 남쪽으로 완전히 밀어냄으로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예성강 하구와 해주만과 연결되는 한강 하구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했다는거야 못했다는거야?’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 역시 학계에서 논쟁 중이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사진자료

고구려영토.jpg

고구려의 최대 영토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A%B5%AC%EB%A0%A4, (2023.12.30.)>

 

장수왕진군로.jpg

장수왕의 진군로 <구글맵>

 

참고문헌

국내논문, 박종서, 고구려 장수왕대 한강유역 진출과 南進路 운영, 서울과 역사 113서울역사편찬원 지음

국내논문, 서영일,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百濟文化 第56, 2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605, (2023.12.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360, (2023.12.2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46, (2023.12.25.)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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