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5장 [전체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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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5장
- 낭비성 전투의 의의-
628년 신라는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낭비성을 점령한 신라는 이어 철원 평야까지 진출했으며, 임진강과 한탄강 이남을 확고히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가 임진강을 중심으로 확정되었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칠중성이 위치한 양주평야에 이어 한강 하류로의 남진 루트였던 철원-포천 지역마저 빼앗기게 되었고, 이후 양국의 전투는 양주평야에 위치한 칠중성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된다.
낭비성 전투의 두 번째 의의는 비열홀 지역에 대한 전략적 중요도가 제고되었다는 점이다. 낭비성 전투에서 별동대는 비열홀 지역으로 진군하여 고구려군의 예비대를 묶어놓는데 성공했다. 비열홀과 평양은 일직선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를 통해 대고구려 압박 수단으로서의 비열홀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비열홀주를 신라의 영역으로 주장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당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진흥왕이 처음 비열홀주로 진출한 뒤 6세기 동안은 계속 신라의 영토였다. 568년 진흥왕이 동북 변경을 순수하며 비열홀주를 잠시 없애고 달홀주(강원도 고성)를 설치하지만, 이는 비열홀 지역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치소의 이동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낭비성 전투 이후로 비열홀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은 고구려는 비열홀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번 군대를 파견했으며, 637년 즈음 탈환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666년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로 귀부하면서 비열홀은 재차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668년 신라는 비열홀주를 다시 설치했다. 673년에는 비열홀주를 없애고 다시 우수주를 두었다. 신라의 동부 지방에서 이처럼 주가 자주 변동되었던 것은 그 때마다의 군사·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축성 있게 이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낭비성 전투의 외교적 의의 역시 중요하다. 신라가 외교 활동을 통해 자국에게 유리한 국제정세를 형성시킨 뒤 이를 활용하여 주도적으로 승리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626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삼국 회맹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는 자신들이 청하여 만들어낸 일시적인 평화를 자신들의 손으로 깨고 낭비성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신라가 조공책봉관계를 중화 중심의 일원적 관계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조공과 책봉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실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낭비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가 7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전개한 실리외교의 시원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사진 자료
한탄강, 임진강 지류와 비열홀 <구글맵>
칠중성 <구글맵>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761(2023.12.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203, (2023.12.27.)
국내논문, 김강훈,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제138호』, 2020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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