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6장 [전체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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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6장
-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628년 낭비성 전투가 끝나며 신라는 북쪽 국경을 임진강-한탄강 선으로 확정하는데 성공하지만, 백제에서 의자가 태자로 책봉된 632년을 기점으로 백제의 공세가 재개되며 위기를 맞이한다. 의자는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신라 서부 국경을 공격했고, 642년에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야성 함락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딸 고타소랑이 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로 향하여 동맹을 맺고 함께 백제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중국 당나라로 향해 나당동맹을 성립시키고 660년 백제를 선제적으로 공격한다. 사비성이 함락당하며 백제는 멸망하고,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한다.
나당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고구려임이 분명해지자 고구려는 외교적 고립을 돌파하고 신라의 북진을 저지하고자 660년 11월 신라의 칠중성(파주 적성)을 다시 공격한다. 칠중성의 신라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방어를 담당한 필부가 전사한다. 이때 신라는 칠중성을 고구려에게 잠시 빼앗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서 임진강 남변에 교두보를 확보한 고구려는 양주 대모산성을 경계로 신라와 대치한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군사력을 할애해야 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접한 한산주의 대고구려 방어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구려는 661년 남천주의 치소와 인접한 술천성(경기도 여주시)과 북한산주의 치소였던 북한산성(=아단성, 아차산성)을 공격했다. 신라는 고전 끝에 북한산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언술된 북한산성은 현재 서울 북부에 있는 북한산성이 아니라, 광진구에 있는 아단성으로 추정되는 아차산성이다.
술천성은 여주군 금사면이포리 수부마을의 뒷산의 8~9부 능선에 축조된 퇴뫼식 토축산성이다. 북서쪽으로는 산지와 연결되고 동쪽은 남한강에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야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북서쪽을 제외하고는 시계가 좋은 지점에 입지하고 있다. 또한 남한강변의 이포나루가 유적의 아래에 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죽령로가 지나고 있어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고구려는 신라를 향한 공세를 칠중성 함락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661년 당나라가 대규모 원정군을 요동, 평양, 압록강 방면으로 파병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기 위해 황해도-임진강 북안의 일부 병력까지 차출해야 했고, 자연스레 고구려-신라 접경 지대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662년 김유신의 당군 보급부대 파견이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5만 명이 평양성 인근에 군량 부족으로 발이 묶이자, 신라는 당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김유신을 파견한다.
이때 김유신이 이끄는 부대는 칠중하(임진강의 옛 이름)을 건너야 했는데, 이때 신라군이 고구려군의 저항을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도하 이후로도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당나라군에게 약 2만 석의 식량을 보급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662년 정월(양력 1월) 고구려 연개소문은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평양성 인근 사수에서 격퇴하며 큰 승리를 거둔다. 병력에 여유가 생긴 연개소문은 그 즉시 퇴각중인 신라군에 수만의 추격군을 파병하여 전투가 벌어지니, 그곳이 바로 임진강변이었다.
사진 자료
대야성 및 백제의 대신라 공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eh/print.do?treeId=020102&tabId=01&levelId=eh_n0150_0010&whereStr= (2023.12.30.) >
나당연합군의 백제 진군로 <구글맵>
백제 부흥운동 <EBS, https://livedown2.ebs.co.kr/ebsvod/elmt/live/%EC%97%AD%EC%82%AC1-_3%EC%A3%BC.pdf(2023.12.30.)>
참고문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2%B0%EC%A3%BC, (2023.12.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566, (2023.12.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545(2023.12.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561, (2023.12.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239(2023.12.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797(2023.12.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183(2023.12.30.)
국내논문, 윤성호, 「신라의 임진강 유역 친출과 대고구려 경계의 형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국내논문,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백종오, 한준영, 오강석, 「여주군의 관방유적」, 『여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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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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