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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1장 [전체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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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juwiki
댓글 0건 조회 543회 작성일 24-01-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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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과 임진강 1장

- 661~ 670년 사이의 정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7에서 김유신 부대와 고구려 군대간의 교전을 다루었다. 당 고종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마저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 파병한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한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나 보급난에 시달린다. 이에 당은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신라는 김유신을 필두로 보급부대를 편성하여 당군에게 약 2만 석의 식량을 제공하고 고구려 추격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뒤 물러난다.

 

겉으로는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 관계가 여전히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을 당시 평양 이남의 고구려고지와 백제고지를 자국 영토로 삼는다는 밀약을 당과 맺었다

 

그러나 당은 백제고지에는 웅진도독부를, 서라벌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며 한반도에 주를 설치하여 기미정책을 실시하려 했다. 신라는 백제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조가 백제고지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 것은 신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였다

 

668년 이전까지는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당의 이러한 정책이 나당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661년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 고종은 고구려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철륵의 반란, 토번의 흥기로 인한 서역 정세의 불안정, 국내의 민생 불안, 그리고 백제고지에서 세력을 떨치던 백제부흥운동진압 작전 등으로 고구려에 원정군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고구려 정복 야욕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나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오니, 고구려를 이끌던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연남생과 연남건 사이가 틀어지며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연남생은 당나라에게 세 차례에 거쳐 지원을 요청하는데, 당은 666년 계필하력을 총대장으로 삼아 연남생을 구원하게 했다

 

같은 해 9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연남생과 합류한 당군은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핵심이자 이전의 수,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던 신성9월에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일시적으로 공격을 중단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당군과 연남생은 6682월부터 고구려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같은 해 9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면서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고구려의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의 공동 목표가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당의 안동도호부 설치로 인해 두 국가의 충돌은 가시화된다.

 

 

나당전쟁이란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멸망한 직후 그 고지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사건을 말한다. 이러한 나당전쟁은 결국 당이 한반도에 대한 기미지배 정책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결과로 이어졌는데, 그 주된 요인 중 하나로는 675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매소성 전투가 꼽힌다.

 

나당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나당전쟁에 대한 학술연구들의 방향성을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린 역사시간에 나당전쟁을 수학하며 두 전투를 배웠다. 첫째는 매소성 전투요, 둘째는 기벌포 전투다

 

각각 675, 676년 발생한 일련의 두 전투로 당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라가 삼국을 불완전하게나마 통일할 수 있었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특히 매소성 전투가 당의 서역 정세 변화에 따른 방기의 결과이며, 철수 작전의 일환이라고 여기며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거둔 승리를 폄하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에 관해 논쟁하기에는 아무런 권위가 없기 때문에, 철저히 글을 작성하는데 참고한 학술 논문들의 입장에 따라 서술할 것이다.

 

 

사진자료

요동방어선.jpg

 

 

고구려 요동 방어선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A%B3%A0%EA%B5%AC%EB%A0%A4-%EB%8B%B9_%EC%A0%84%EC%9F%81(2024.1.1.)>

 

토번.jpg

토번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B2%88(2024.1.1.)>

 

백제부흥운동.jpg

백제부흥운동  <https://livedown2.ebs.co.kr/ebsvod/elmt/live/%EC%97%AD%EC%82%AC1-_3%EC%A3%BC.pdf(2024.1.1.)>

 

참고문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B2%88, (2024.1.1.)

국내논문, 曹 凌, 고구려의 멸망에서 나당전쟁 발발로, 中國古中世史硏究 第44, 2017

국내논문, 권창혁, 나당전쟁 시기 매소성 전투와 신라의 북방전선,한국 고대사 연구 95, 2019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제20회 661년~670년 사이이 정세

제21회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제22회  나당전쟁의 전개

제23회 임진강 혈투

24회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1회 한강 하구의 가치와 임진강의 지형적 특성

제2회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

제3회 파주의 요충 중에 요충지, 파주와 적성

제4회 임진강 유역 삼국의 관방시설

제5회 백제를 중심으로

제6회 고구려와 신라를 중심으로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7회 6년전쟁의 배경

제8회 고구려의 392년 공세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제10회 평양천도와 나제 동맹

제11회 한성로와 장수왕의 한성 공략 

제12회 고구려 퇴각과 임진강 방어선의 확립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13회 나제 동맹군의 한강유역 진출과 독산성 전투 

제14회 나제 동맹의 결렬과 관산성 전투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제16회 낭비성 전투

제17회 낭비성 전투의 의의

제18회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

제19회 662년 임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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