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2장 [전체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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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과 임진강 2장
- 고구려 멸망부터 나당 전쟁 발발까지-
‘나당전쟁과 임진강’ 1편에서 나당전쟁과 매소성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함을 언술했다. 핵심은
‘과연 당나라가 대신라 전선을 방기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인데, 이를 알기 위해선 우선 660~670년 사이 당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한창이던 661년, 당나라의 서쪽에서는 토번이 녹동찬의 주도 하에 크게 흥기한다. 토번은 티베트고원의 중앙에 성립된 고대왕국으로, 617년에서 842년에 송첸캄포에서 랑다르마에 이르기까지 2백여년간 지속된 티베트 지역 역사상 국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였다.
구당서에서는 토번의 황실을 선비족 탁발씨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다. 66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역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토번은 663년 토욕혼을 멸망시킨다. 당나라의 대응은 이때까지도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고구려와 악전고투를 벌이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전선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670년 토번이 당나라가 통제하고 있던 서역의 18주를 빼앗으며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위협하자, 당은 명장 설인귀를 총대장으로 삼아 토번에 원정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당은 대비천 전투에서 대패하며 원정군이 거의 전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 고구려 부흥군이다.
당의 두 명장 중 한명인 유인궤는 치사致仕하였고, 설인귀는 토번 지역으로 출정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고지에 대한 당의 통제력은 약해졌다. 이 틈을 타 고연무, 검모잠 등이 세력을 모아 고구려 부흥 운동을 시작했으며, 당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신라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오골성 인근에서 친당 부용 세력인 말갈 군대와 교전을 치러 크게 승리를 거두는데, 이 전투를 나당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본다.
이후 670년 7월 즈음 안승과의 의견 대립으로 검모잠이 피살되고, 안승이 신라로 귀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또한 신라군이 백제 부흥군과 전투를 벌이며 백제고지로 진입하는데, 이 두가지 사건과 앞의 말갈과의 전투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고구려 고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당나라는 대비천 전투 패배 이후 서쪽 국경에서는 방어적 입장을 취하고 시선을 다시 동쪽, 고구려고지로 돌려 671년까지 고구려 부흥 운동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안동도호부도 계속 유지시켰다. 그리고 신라가 당에 파견한 김흠순을 통해 신라가 점유한 백제 땅을 모두 반환할 것이며, 신라의 무기 제조 기술을 요구하는 등 신라를 몰아세웠다. 이는 나당동맹의 성립 조건이었던 ‘대동강 이남의 영토는 신라의 영토로 인정한다.’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기에, 신라는 결국 당나라와의 전쟁이 필수불가결함을 깨달을 수밖엔 없었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B2%88(2024.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063(2024.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068(2024.1.1.)
국내논문, 曹 凌, 「고구려의 멸망에서 나당전쟁 발발로」, 『中國古中世史硏究 第44輯』, 2017
이서진의 '임진강 전쟁 역사'
제5편 나당전쟁과 임진강
1편 - 임진강의 전략적 중요성 -
제2편- 광개토대왕의 6년 전쟁
제9회 관미성 탈환을 위한 백제의 반격과 고구려의 396년 공세
제3편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임진강
4편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제15회 임진강 유역 신라의 관방시설과 고구려의 새로운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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