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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천도와 광해군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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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kadmin
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24-07-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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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는 불임이었다. 대군이 탄생할 가망이 없자 신료들은 군(君) 중에서 세자를 정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선조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몽진이 불가피해지자 신료들의 압박에 밀린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장자 임해군은 여러 악행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피난길에 오르는 바람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교서는 평양에서야 반포할 수 있었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고집하자 신료들의 건의에 따라 분조(分朝)를 결정하였다.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수개월 동안 평안도 · 강원도 ·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하는 등, 국왕의 몽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규합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따라 무군사(撫軍司)를 이끌며 야전을 누볐다. 이에 민심은 선조를 떠나 광해군에게 크게 쏠렸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견제하였다.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는 자리에 임해군을 동석시키는가 하면, 젊은 계비에게서 끝내 영창대군을 낳는 등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奏請)은 무려 다섯 차례나 거절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어렵게 즉위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국왕 책봉을 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 임해군의 병세가 과연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차관을 파견하는 등 새 국왕 광해군에게 씻기 힘든 수모를 주었다. 결국 책봉을 받기는 하였으나,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출생 신분은 광해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이 심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의신은 한양의 지기가 다해 새로운 곳으로 도읍을 이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지기가 다한 증거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여러 차례의 모반 사건과 당쟁의 격화, 서울 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광해군 4년(1612) 11월 15일 술관(術官) 이의신이 “도성의 왕기(旺氣)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읍을 교하현에 세워 순행을 준비해야 한다”고 상소함에 따라 왕이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새로운 길지로는 교하가 적지이며 군사적으로도 방어에 유용하고 중국 대륙과 해상교역 가능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즉, 임진왜란을 계기로 풍수지리설을 신봉하게 된 선조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은 정통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풍수에 깊은 관심을 보여 교하천도를 시도하고 인경궁과 경덕궁 공사를 동시에 강행하였다고 보았다.

 

이처럼 국왕이 신비주의적 풍수를 신봉함으로써, 고려 시대에 유행하다 조선에 들어 크게 위축되었던 풍수지리설이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왕은 이의신의 상소에 대하여 예조 판서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1612.11.15(음)일 검토 내용을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이의신 교하 천도 주장은 경전에 나타나지도 않은 말을 주어 모은 괴이한 글이라고 했다.

 

예조판서 이정귀는 새 도성 건설을 주청하는 이의신의 상소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필부의 주장만으로 정도 2백년 도읍지를 옮김으로써 백성들을 떠돌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회계(回啓)한다.

 

그해 9월 14일 승정원에서 이의신이 올린 상소에 대해, ‘국도(國都)는 기운이 쇠하였으며 교하가 길지’라는 요설(妖說)로 인심이 흉흉하니 이의신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아뢴다.

 

여기에 이항복은 과거 어느 나라도 도읍을 이유 없이 옮긴 적이 없다며, 산이 헐벗은 것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함부로 벌채한 탓일 뿐, 중국에서 새 왕조가 일어나도 계속 같은 곳에 도읍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지기가 쇠하여 천도하여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 없음을 비판 상서하였다.

 

광해군은 보고를 한 예조 판서에게 옛부터 새로운 도성을 세우더라도 반드시 이전한 것은 아니다. 왕이 근거 없는 말로 천도한다는 지적은 삼가하라고 지시했다.

 

교하천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왕은 1613.1월 비변사에 비밀 전교를 통해 교하는 강화를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특이한 곳으로 성을 쌓고 가끔 순행하려고 하니 대신과 지관은 현장의 형세를 그려 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兩司)가, 교하는 뒤로 보호해주는 고산준령이 없고 길고 큰 강의 옹위함도 없는 강 하류의 습지일 뿐 도저히 요새지역[保障之地]이 될 수 없는 곳이므로 대신에게 내린 왕심(往審)의 명을 거두어 민심을안정시켜 달라고 합계(合啓)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3년간 100여 차례 상소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

 

그러나 2년 뒤 이윽고, 천도설의 주창자인 이의신이 파직되어 떠나게 됨에 따라 교하천도는 자연스레 추동력을 잃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심리에 좌도[左道, 風水]를 신봉하던 광해군이 한양의 지기가 쇠퇴하여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는 술사 이의신의 말을 맹신하여 2년여 교하 천도를 추진하려 했으나 중의(衆議)의 반대로 무산되자,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을 짓기로 함으로써 국력만 소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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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 파주위키 편집위원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해군>

2. 학술논문 '통일수도 입지로서의 교하 지역 풍수적 평가' - 손진수, 2017년

3. 파주위키 - '교하 천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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