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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마을과 광탄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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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kadmin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25-02-21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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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청 블로그 중 2020.2.27일 게재된 '누가 있어 그 아픔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3.1절 특집 내용 중 일부이다.

 

 

 

누가 있어 그 아픔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후 3월 27일 광탄면사무소에 몇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다음 날 공릉장터(현 봉일천 시장)에 1천여 명이 모였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우리 마을(발랑리) 사람들이다.


광탄에서 출발해 고창마을 모퉁이를 돌 무렵 일본 경찰들의 총격에 6명이 돌아가셨다. 광탄면 주민 3명과 발랑리 주민 3명이었다. 당일 주동자로 잡혀간 9명이 모두 발랑리 주민들이며 복역 중 옥사한 이도 있고, 출옥 후 대부분 마을을 떠나 이러한 사실들이 오랜 시간 묻혀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해방되기까지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만세운동을 하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어디서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었고, 감시가 심하니 누구든 그들과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그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만 했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은 후손을 남기지도 못했다. 옥고를 치르기 전에 자손을 낳은 경우만 대가 이어졌으니 그때 다녀온 분 중 4명이나 대가 끊겨 버렸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불과 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났다. 과거사를 밝혀내고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까지 몇십 년이 걸렸으니 이미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세탁된 이후였다. 누가 있어 그 아픔을 기억하고 밝혀냈겠는가?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 

전설처럼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1992년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양자로 들어간 어느 분의 아들이 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독립투사관련 판결문을 찾아낸 것이다. 공식적인 자료를 찾아낸 후 마을에서 그분들을 위한 기념비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실제 추진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다 될 것 같던 일도 막바지에 틀어지고 그렇게 또 20여 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2010년 365개의 게양대를 세우고 1년 내내 태극기를 게양해 태극기 마을을 만들자는 의견이 다시 거론됐다. 예산지원이 될 줄 알고 자재를 모두 준비했으나 또 무산되었다. 방송국에서까지 오기로 했는데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주저앉으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아 그때 내가 1천만 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설날 자녀에게 받은 용돈까지 내놓으며 기꺼이 동참했다. 몇만 원에서 몇백만 원까지 이 작은 동네에서 그렇게 모은 돈이 무려 4천만 원이었다.

태극기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다음 단계의 일이 시작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한 3월 27일을 기해 매년 희생된 9인의 추모제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9인분의 제기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제기를 만드는 모 회사의 대표가 우리의 의도를 알고 흔쾌히 도와주어 부족한 비용으로나마 제사 도구를 준비하게 되었다. 독립투사들의 영혼이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주시 블로그에서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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