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회가 쓴 용상골 역사 ③- 김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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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골에서 태어나 파주시에서 공무원을 역임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는 자신의 고향인 용상골이 작은 고장이지만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
최근 용상골과 주변의 역사자료를 정리해 '내 고향 용상골'이라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파주위키는 공개 내용을 3회에 걸처 '소리치 광장'에 게시한다. -편집자 주-
3편, 용상골은 옛 파주 천정구현의 관아
세 번째는 용상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용상골 마을의 명칭은 당연히 용상사의 명칭에서와 같이 임금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에 용상(龍床)골이라고 하는데 용산(龍山)골이라고도 한다. 임금이 머물던 산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용상골에는 몇 가지 지명이 전해져 내려온다.
o ‘용상골’은 고구려 때 천정구현(泉井口縣) 관아가 있던 곳이다. 옥터골, 향교골, 도장골 같은 지명이 우연히 생긴 명칭이 아니다. 천정구(泉井口)가 샘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현(縣) 명칭도 솥우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이 월롱산 줄기중 하나인 응봉산 자락 풀무골에 농기구와 병장기를 만들기 위해 큰 풀무를 설치한 대규모 대장간이 있다는 것은 지역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고 산성을 지키고 훈련시켜야 하는 병사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대장간에서 반드시 필요한 쇠를 조달했던 지명인 금촌 지역의 쇠재와 쇠곶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려 현종이 피신할 때 당연히 기존 천정구현 관아를 임시 궁으로 정했을 것이다. 천정구현 관아이면서 궁이기에 지금까지도 ‘궁밭’이라고 불려온 곳이 있다. 용상골과 관련한 군현 행정구역 창설 및 고을 명칭과 변경 연대, 관아소재지가 기록되어 있다.
‘서기 146년 고구려 7대 차대왕 때 용상골 산10번지에 천정구현(泉井口縣)을 두었다.’
‘서기 371년 백제 13대 근초고왕 때 용상골 산140번지로 관아를 이전하고 굴화현(屈火縣)으로 변경하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 20대 장수왕 때 관아를 용상골 산140번지에 그대로 두고 굴화현을 천정현(泉井縣)으로 변경하였다.'
-굴화현의 천정구현 관아터-
‘서기 551년 신라 24대 진흥왕 때 관아를 용상골 산140번지에 그대로 두고 천정현을 선성현(宣城縣)으로 변경하였다.’
‘서기 1460년 조선조 7대 세조 때 관아를 아동면 아동리 175번지로 이전하고 선성현을 교하현으로(交河縣)으로 변경하였다.’
ㅇ ‘궁밭’은 현재 9사단 28연대 3대대 후문 쪽 평화농원 자리를 ‘궁밭(과거 용상골 김oo 소유 田)’이라 불려왔다. 지금은 하천 직강공사 등으로 약간 변형되긴 했으나 크게 변하진 않았다.
*우측 사진은 궁밭이라고 전해오는 곳으로 천정구현 관아로 추정됨*
ㅇ ‘옥터골’은 용상사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첫 번째 골짜기로 옥(獄)이 있었다고 한다. 천정구현 관아가 있던 자리와 일치한다.
ㅇ ‘도장골’은 그린 전원주택이 있는 골짜기로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설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규, 閨)을 도장이라 한다.
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방처럼 아늑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설은 도자기를 굽던 골이라는 설이다. 이는 경기도 박물관에서 2004년 조사 보고한 월롱산성 유적보고서 덕은리 유물산포지 7(보고서 P451-452)에서 백제 토기로써 이를 뒷받침할 수 있고, 이 유물산포지에서 남서쪽으로 100미터쯤에 군부대로 넘어가는 고개가 황토고개로 여기서 토취하여 도자기를 구웠을 것이다.
*우측의 사진은 공장지대가 된 도장골-월롱산 자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아늑함*
ㅇ ‘향교골’은 용상사에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두 번째 골짜기로 향교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군부대 사격장이다.
ㅇ ‘큰골과 작은골’은 용상사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향교골과 같은 곳이다.
ㅇ ‘괭이산’은 용상사 바로 아래 위 보고서 덕은리 고분 2(보고서 P338-350)가 있는 조그만 산으로 고양이 산이라고 한다.
o ‘굿당골’은 괭이산 기슭에 있었는데 굿을 하는 이름난 만신이 살았다고 한다.
ㅇ ‘참의골’은 용상사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오면서 군부대 사격지휘부 바로 옆 골짜기로 ‘차만이골’이라고도 하는데 육조에 둔 정3품 벼슬인 참의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ㅇ ‘마당바위’는 월롱산 정상에 가장 너른 바위 중간에 있다. 어떤 장사가 오줌을 누어 구멍이 뚫렸다 하는데, 지금도 홈이 파인 곳을 확인할 수 있다.
ㅇ ‘벽장굴’은 마당바위에서 정 동쪽으로 10여 미터 앞 절벽 중간에 있다. 규모가 작은 굴로 벽장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조 초 덕은화주께서 소불석상을 조성하여 벽장굴에 모셨다 한다.
ㅇ‘솥우물’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소도가 있던 우물이라고 하여 소도물이라 하기도 하고, 샘에서 물이 솟는다 하여 솟우물이라는 설이 있으며, 우물이 셋이 있다하여 셋우물(서두물)이라 증언하는 분도 있는 반면, 솥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듯이 쉽게 뜨는 물이라 하여 솥우물이라는 설 등이 있다.
파주군지에는 ‘솟우물’이라고 되어 있다.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우물 뒤편으로 조그만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 마루에는 신성시한 노송이 몇 그루 있었고, 그 소나무 주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당굿이 행해졌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참견한 일이 있는데, 어머니는 밤을 새우셨다. 바로 이 자리가 무속신앙을 숭앙해 내려왔던 것으로 봐서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한 구역인 소도라는 말에도 신빙성이 있다.
그 옆으로 솥우물에서 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솥우물 고개라고 불렀고, 마루턱쯤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아무튼 2008년 솥우물 정비사업 완료 후 ‘솥우물’로 최종 결정하여 현 표지석을 세웠다. 과거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고 솥우물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엄청나서 파주군이 상수원으로 제안하였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
지금은 공장 등에서 쓰는 물이 상당한데도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물량이 많아 인근 주민이 샘물을 먹고도 남아돈다. 그러니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옛 천정구현(泉井口縣)이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이제 솥우물은 파주시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간이상수도로 남아 있으나, 2024년부터는 이를 폐쇄하고 광역상수도로 교체한다고 한다.
ㅇ ‘검바위산’은 용상골 남서쪽에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월롱산성과 함께 관망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일부 검은 바위는 거지바위, 쥐산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공장지대로 없어졌다.
ㅇ ‘가살미’는 솥우물, 용상골 어귀에서 금촌 방향으로 나 있던 논둑길로 논가생이길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는 ‘배미’와 같이 논을 일컫는 단위로 본다. 용상골 사람들은 주로 가살미로 해서 생활권인 금촌을 나들었다.
ㅇ ‘구랫자리’는 가살미의 한 부분으로 고래자리 즉 고래 논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이라는 고래 논의 뜻에 부합되었다.
ㅇ‘동지미’는 솥우물에서 정 동쪽 영태리로 넘어가는 작은 골짜기로 동쪽에 있는 촌(村)이나 후미진 곳(凹)을 뜻한다.(이돈주의 지명의 자료와 우리말 연구 참고)
ㅇ ‘정지미’는 솥우물에서 700여 미터 서북쪽 후미진 곳으로 전지미, 경지미라고도 하는데 정확히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전국에 전지미라고 부르는 곳은 많다. 마을 앞 후미진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장지대가 된 쟁골-
ㅇ ‘쟁골’은 솥우물에서 300여 미터 북쪽으로 옹기 등을 굽는 ‘장이’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장이가 쟁에서 재∼앵으로 변형되어 발음한다.(울산 동구 문화원 지역연구소 장세동 소장 참고)
옛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 맨 먼저 안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안동김씨, 연일정씨, 고성이씨, 청해이씨 등이 속속 들어와 사십여 호의 촌락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한다. 우리 안동김씨는 12 · 3 호 정도 정착해 살았다.
현재 5대조께서 선산에 모셔져 있고 그 윗대 일부는 실전 된 것으로 봐서 19세기 초반에 문산 칠정면에서 용상골로 세거지를 옮겨왔다고 본다. 지금의 文山(문산) 이천리인 배내는 배가 드나들 정도로 번화하였으나 물이 좋지 않아 용상골로 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할아버지께서 용상골로 오신 얼마 후 곰을 잡으셨다고 해. 어떻게 잡으셨냐 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잡으셨는데, 첫 번째 방법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커다란 돌을 동아줄로 묶은 다음 느티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곰이 와서 그 돌을 툭 건드린대. 그러면 흔들거리는 돌이 돌아서 가려는 곰의 뒤통수를 치니까 화가 난 곰이 그 돌을 힘껏 치면 돌이 공중으로 치솟는다네. 곰탱이가 내려오는 그 돌을 머리로 맞받으니 박살이 날 수밖에.
두 번째 방법은 고목나무에서 겨울잠을 자던 곰이 봄이 되어 세상에 나갈 수 있나하고 손가락을 밖으로 내밀어 본대. 그러면 그 손가락을 도끼로 잘랐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번에는 다른 손가락을 또 내민대. 그 다음에는 발가락을, 또 다음에는 다른 발가락을 내밀어 모두 잘라 잡으셨대.” 재미있자고 하신 이야기다. 19세기 초반 용상골 뒷산인 월롱산에 숲이 우거졌기에 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용상골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이 1968년 12월 1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용상골은 여느 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6.25 이후 피란 온 분이나, 타 지역에서 이곳 농촌마을로 이사와 살다가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다. 앞에 언급한 대로 안씨 등이 마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다른 성씨들이 살지 않았겠는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조 현종이 피란할 때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거나 적절치 않은 지역으로 올 수 있었겠는가. 또 대중이 없는 월롱산에 절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현급 관아와 규모가 큰 산성이 있고, 유적·유물조사보고서의 유물산포지인 도장골과 굿당골에서 백제시대의 토기와 석곽총이 발견된 것은 나름대로 하나의 지역문화를 꽃피우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도 중반에는 용상골 입구 솥우물을 말끔히 정비하고 월롱산 등산로를 개설함으로써 파주 시민들의 이용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가 커져 이에 따라 인구도 늘어난다.
국가 또는 나라라는 큰 단위의 공동체도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역사가 엉뚱하게 기록되기도 한다. 하물며 도·시·군·읍·면·동 단위도 아닌 자연마을 단위에서야 어떠하겠는가. 더욱이 지명 등은 우리 고유어를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와전되었을 것이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다르게 발음도 하였을 것이다. 기록되어 있는 역사도 다양하게 또는 왜곡되게 해석하는데 기록되지 않은 역사야 말해 무엇 하랴. 용상골은 작은 자연마을에 불과하지만 이제라도 누군가는 기록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적혀 있다. 국어 학자들이 정의한 것이니 모두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셋 중에서 왠지 세 번째가 늘 내 가슴에 웅크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고향을 나왔다고 해야 엎어지면 코 닿을 데지만, 그럼에도 고향에 대하여 항상 목이 마르다. 그러니 수몰로, 군 훈련장 수용(적성면 무건리, 법원읍 오현리, 직천리 등)으로 고향이 없어져 떠날 수밖에 없는 분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6.25전란으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 나라를 잃고 가난으로 낯선 타지 타국으로 유랑하는 조선의 디아스포라를 떠올리면 고향은 ‘그립고 정든 곳…’이기 전에 슬프고 아프고 쓰리고 아린 그 무엇이 아닐까. 심지어 겨우 정착했던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계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입양되었던 이들이 혹 자기를 버렸던 부모와 고국을 찾아 왜 다시 돌아올까요. 그래서 고향은 그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공글리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쓴 것이 주먹구구식 또는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틀린 부분이 있거나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주저 없이 개진하여 올바르게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내 고향 용상골이 역사를 간직한 풍요롭고 아름다운 고을로 발전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끝>
김태회 향토연구가
-전체 목록 -
1편, 월롱산과 월롱산성은 파주의 역사 바로가기
2편, 용상사와 거란전쟁 바로가기
3편,용상골은 옛 파주 천정구현의 관아
고구려 시대 용상골 위치 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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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이님의 댓글
최초이 작성일
처음 용상골을 보았을때 월롱산이 병풍처럼 뒷쪽으로, 마을은 동남방향으로 따스한 햇살이 펼처진 모습이 마치 어머니 품같은 아늑한 곳이었다. 향토사학자 김태회선생이 사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수고에 감사드린다.
늘푸른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장향수님의 댓글
장향수 작성일파주 시민들에게는 요긴한 자료가 아닌가 쉽습니다. 파주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지명을 보면 이름 속에 그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더군요. 어느 곳이든 조상님들 에게서 받은 귀한 땅이니, 우리들 또한 훼손하지 말고 아껴 쓰다가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물려주었으면 합니다. 작가님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