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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회가 쓴 용상골 역사 ②- 김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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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kadmin
댓글 2건 조회 1,457회 작성일 24-09-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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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골에서 태어나 파주시에서 공무원을 역임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는 자신의 고향인 용상골이 작은 고장이지만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


최근 용상골과 주변의 역사자료를 정리해  '내 고향 용상골'이라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파주위키는 공개 내용을 3회에 걸처 '소리치 광장'에 게시한다. -편집자 주-

 

2편. 용상사와 거란전쟁

다음은 용상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용상사를 언급하려면 먼저 고려와 거란전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와 거란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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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사 대웅전 2013.12.15일 / 파주위키- 

 

1차 고려와 거란전쟁은 993(성종 12) 거란(요나라)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 설치하고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였다. 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가 고려와 교류하려는 목적이 깔려있었다. 물론 요가 송을 치려는데 고려를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요나라와 약조한 것과는 달리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여 재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2차 전쟁은 1010(현종 1) 요의 성왕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강조의 정변에 그 잘못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해왔으나,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고 고려와 요와의 관계를 재확인시키면서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거란은 개경까지 점령하여 항복론까지 거세졌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신했다. 그 후 화친을 요구하여 고려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으로 거란은 물러갔다.

 

3차 전쟁은 개경에 돌아온 현종이 요에 친조하지 않았음은 물론 강동 6주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도리어 1013년 거란과의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함으로써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소배압은 개경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승전으로 몇 천 명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물러갔다. (고려 거란 제1, 2, 3차 전쟁은 위키백과를 참조함)

 

세 차례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통하여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였고 그 전후에도 피신하였는데 그 때 잠시 머물던 곳이 월롱산성이 위치하고 개경에서 가까운 용상골이었다. 당시 피란하여 임시 거처로 추정되는 궁밭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구전된다.

 

용상사에 대하여는 일단 사찰 내에 있는 현판 내용을 그대로 쓴다. 용상사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성종 12(993), 현종 1(1010), 현종 9(1018)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의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환궁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1445)에 중건하였으며, 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인근 벽장굴에 조성해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고, 1799년에 편찬한 범우고에 보면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말이 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에는 1926년에 정염스님이 폐허가 된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 전에 중건되었고,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 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이다

 

정통십년명석불좌상 (正統十年銘石佛坐像)은 높이 61센티미터에 폭이 50센티미터 정도인 소형불좌상이다. 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툼하다. 바닥에는正統十年 乙丑五月oo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성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서 절이 없어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고려 현종과 관련하여 이룩한 사찰인 용상사는 현재의 위치가 아님을 몇 가지로 확인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필자가 직접 겪은 일을 피력해 보겠다. 1980년대 초 현 용상사에서 동남쪽으로 400여 미터 지점에 박모씨 가족이 살았다

 

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현 배수지자리에 묘를 쓰기 위하여 땅을 팠는데, 돌약탕관과 청호리병이 각각 한 점씩 발굴되었다. 그 물건이 역사적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해서 파주군 공보실을 거쳐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했다. 얼마 후에 결과통지문을 받아보았는데, ‘고려시대 유물로서 특히 돌약탕관은 사찰에서 차를 끓일 때 쓰는 다관이며 청호리병은 당시 물을 담는 용기로 쓰였으나 질은 좀 떨어지는 물건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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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2010년 월롱산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국방문화재연구원에서 문화재시굴조사를 한 결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절터라고 보고된 바 있다. 이 외는 빈대가 많아 폐사되었다고 하는 설과 유생들이 못살게 굴어 폐사하였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어쨌든 월롱산 배수지 자리가 현종이 환궁하면서 기념으로 짓도록 한 절터로 추정된다.

 

현판에 용상사가 승병의 도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상사 바로 뒤 월롱산성 정상에서 LG디스플레이 쪽으로는 지형이 약간 비스듬하게 펼쳐져 있어서 옛날에는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훈련하기도 했는데, 사망자가 발생하면 무덤골에 매장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시체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월롱산과 기간봉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금승리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낙엽송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덤골이라는 명칭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승병의 지휘본부는 현재는 채석으로 절벽이 되었지만, 바래미산 뒤쪽에 있던 병무관(兵武館)이라고 한다

 

내가 월롱국민학교 다닐 때인 1960년 초 부터 친구들과 병무관을 여러 번 다녔다. 약수도 있고, 산중턱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는 걸 자주 보았다. 나는 떡이나 과일을 얻어먹고 바로 산 넘어 용상사 쪽으로 해서 집에 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병무관이라는 명칭에서나 규모 등으로 봐서 승병 도량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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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회 향토연구가

 

전체 목록

1편, 월롱산과 월롱산성은 파주의 역사 바로가기

2편, 용상사와 거란전쟁

3편, 용상골은  옛 파주 천정구현의 관아 바로가기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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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이님의 댓글

최초이 작성일

거란전쟁, 임진왜란 등 용상사가 전장에 한복판에서 병참 역할을 하였으며, 우리 조상들의 고난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흥미진진한 3편이 기다려진다. 글쓴이에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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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미님의 댓글

김양미 작성일

월롱에 살면서도 용상사에 대한 역사를 자세히 몰랐는데 선배님 덕분에 역사의 진실을 배우게 되었네요~~읽다보니 3편이 기대됩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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