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부사 고영근 선정비의 발견과 평가-이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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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학연구소는 2024·8.8일 민통선 장단지역에 소재한 모 수색대대에서 장단부사를 역임한 고영근의 선정비를 발견했다.
이 비는 해당 부대장이 부내내 존치된 비석의 가치 및 역사성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으로 차문성 파주학연구소장과 서교송 사무국장이 현지 출장으로 비석의 주인을 찾았다.
고영근 선정비는 조선 시대 장단부사로 재직했던 기간 동안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정비는 현재 장단에 위치한 군부대 내에 있으며, 비신의 높이는 약 1m 정도로 비석의 아래쪽과 받돌은 흙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는 확인이 필요하다.
비석의 앞면에는 "行府使高公永根淸白愛民善政碑(행부사고공영근청백애민선정비)"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19세기 당시 유행하던 형태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비석의 앞면 비제 옆에는 16자의 공덕문이 있으나, 현재는 흙에 묻혀 일부만 확인 가능했고 고종 황제가 고영근의 선정을 인정하고 특별히 한 임기 연임을 윤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을것으로 추정한다.
전문가들은 선정비의 보존 상태를 고려하여 주변 굴착을 통해 땅속에 묻힌 비석의 하단부와 받돌을 확인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른 선정비들과 함께 비석군을 조성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고영근은 민족진영과 변절로 나뉘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어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다만, 고종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일관된 행보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고영근은 장단 부사, 통진 부사 등을 역임하며 백성을 위해 힘썼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정비가 세워졌다. 특히 장단 부사 재직 시절에는 백성 구휼에 힘썼으며, 황제의 특별한 윤허로 연임하기도 했다.
그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중추원 의관 등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개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는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을 직접 처단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후 고종의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을 지냈다.
고종 승하 후에는 고종을 황제로서 예우하기 위해 스스로 능표석에 '고종 태황제' 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는 이 사건으로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았다.
고영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다양하며, 변절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의 행적을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출세를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는 주장과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고종 황제의 능표석에 글자를 새기는 등의 양면성은 개인의 성향일 수 있다고 본다.
한국전쟁 이후에 장단군이 파주의 관할이 되어 발견된 선정비가 파주의 역사적 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지만 파주에서의 역사적 평가는 시기가 이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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