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현장, 파주에서 본 통일① -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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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인 파주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가 재직기간 동안에 경험하고 느꼈던 통일 이야기이다.
작가는 월롱면 용상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대남방송을 들으며 자랐고 1984년 남한에서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을 DMZ내 대성동에서 인수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고 한달 후인 2월에 이북 실향민 700여명이 도라산역에서 망향제를 지낼때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파주시에서 35년의 공직생활하면서 1950년 전쟁 이후 피난민과 그 후손 베이비부머들이 가졌던 통일에 대한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현 시대를 보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편집자 주>
-게재 순서-
-1편, 내가 본 분단의 현장 -
최근 어느 인사가 “통일하지 맙시다.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읍시다.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합시다. 통일을 후대로 넘깁시다.”라고 말하여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맞다, 그르다 등 비난이 난무한 가운데 매우 신중히 바라보는 경향이 많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공개한 ‘2024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다르면 통일이 필요치 않다는 비중이 35%로 집계돼 2007년 관련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다고 한다. 특히 2,30대 젊은 층에서는 절반 가까이가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통일이라는 게 너무나 중대하고 어려워 어떻게 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런 지혜도 없다. 다만 우리가 평화를 위한 남북대화와 활동 등은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나를 간략하나마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다. 또 남북이 대치한 전방지역에 살면서 내 몸은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를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나는 6.25전쟁 중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살면서 어려서부터 늘 대남방송을 듣고 자랐다. 월롱산 등성이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은 내 귀에 대고 확성기를 튼 것 같다. 다들 왕왕거린다고 표현했다. 특히 북서풍이 부는 추운 겨울 새벽이나 고요한 밤, 강력한 음성에 특유의 억양을 더한 방송이 들려오면 나는 솜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잔다.
어떤 때는 남한의 대북 방송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대남방송은 몸에 배어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은 오히려 이상했다. 그 고요함이란! 아마 대남방송을 하는 곳은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나 만우리, 대동리 건너편 북한 땅이 아닌가 보여 진다. 용상골에서도 그럴 지경인데 탄현과 같은 최접경 주민들은 어떠했을까.
내가 사는 월롱면 용상골 서편에는 한국군 2개부대가 있고, 산 너머에는 미군부대도 있었다. 용상골 동네 앞 산기슭에는 탄약고가 여기 저기 설치돼 있어 미군과 카추샤가 초소를 지켰다. 초소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 있는 탄약고는 14번부터 19번까지 여섯 군데가 있었다.
여기를 지키는 개 보초(셰퍼드 군견을 데리고 보초를 서는 초병)를 교대시키기 위해서 교대 차(GMC 트럭)가 일정 시간 간격으로 순회하였는데,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신작로를 달리는 그 트럭은 늘 먼지를 뽀얗게 날렸다. 또 미군들이 훈련을 하면 용상골에 있는 월롱산, 검바위산, 안산 등 온 산에서 밤새도록 총(탄피 모양이 삼층으로 되어 있어서 삼층 총알이라고 부른다)을 쏘아대었고, 매일 벙커 작업도 했다.
자연히 한국군은 물론 미군들과 늘 대면하고 살았다. 그래서 영어도 배우지 않았을 때도 미군들과는 쪼꼬레또(초콜렛을 이렇게 부른 것 같다. broken)영어로 대충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아무튼 총소리, 대포소리, 탱크소리와 북한의 대남방송은 사람 일상에서 흔히 듣는 소리와 섞여 자연스럽게 들렸다. 그렇게 자라면서 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어린 나에게도 ‘통일’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염원하게 되었다.
내가 코흘리개 자식까지 둔 어른이 된 80년대 초(1983. 6. 30∼11. 14), KBS에서 방영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방송을 나는 숨죽여 때론 눈물이 뺨을 줄줄 흐르는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만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물론 우리나라와 동포가 있는 세계 방방곡곡에서 눈물바다를 이룬 것은 당연하다.
곽순옥이 애달프게 부르는 〈누가 이 사람은 모르시나요〉를 부르는 가운데 도처에서 극적인 해후상봉을 하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몸부림을 심지어는 까무러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전쟁으로 헤어짐이었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끼는 기회였고 통일이 꼭 되어야겠구나하고 마음 깊이 염원하게 되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는 이산가족이 없어 이산의 쓰라림을 모르고 자랐다. 40년도 더 지난 그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극적인 장면을 다시 확인하고는 지금도 어느새 눈물이 쏟아져 안경을 자주 벗어야한다. 흔히 연로한 어르신들이 “우리는 다 살았으니 자식들 세대에는 적어도 전쟁 같은 건 없어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시는 걸 여러 번 들었다. 손주가 한창 자라고 있는 나도 똑 같은 심정이다.
임진각에는 1985년 8월 26일 조성된 망배단이 있다. 망배단에서는 지금도 추석절이면 북쪽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조상을 향해 경모제를 치르고 있다. 그 옆에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비도 있다. 이 곡은 설운도가 불러 곽순옥이 부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와 함께 크게 히트를 쳤다.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며 국민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어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실향민들의 한을 여지없이 보여준 노래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노래 제목은 ‘그리운 나의 아버지’였지만 1983년 KBS‘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출연하여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잃어버린 30년’으로 바꾸어 불렀다. 발표 후 최단기간 히트곡으로 인정되어 기네스북에 기록되었으며 이산가족 상봉 방송자료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잃어버린 30년 (박건호 작사/ 남국인 작곡/설운도 노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 다음에 계속 : 2편 남북화해 분위기 고조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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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태성님의 댓글
김태성 작성일그 시절에 대한 생생한 체험으로 써주신 글 뜻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초이님의 댓글
최초이 작성일
우리 민족의 통일에 관한 서문 만 읽었을 뿐인데 긴장감이 있다. 앞으로 전개될 뒷 이야기가 기대된다.
흥미롭게 글을 다듬은 글쓴이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봉서산님의 댓글
봉서산 작성일같은 접경지역에서 미군부대 주변에서 성장하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추억을 되살아나게 해 주신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파주시한구인님의 댓글
파주시한구인 작성일
여자로 생각을 했는데.. ㅎ
잘 보았읍니다
장향수님의 댓글
장향수 작성일가슴으로는 통일이 맞는데, 얄팍한 머리로는 두 체제 두 국가를 인정하여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짧은 생각이 듭니다. 남북 접경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작가님의 체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성석현님의 댓글
성석현 작성일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글~
잊고 있던 모습을 그리게 되네요.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