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현장, 파주에서 본 통일② -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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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인 파주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가 재직기간 동안에 경험하고 느꼈던 통일 이야기이다.
작가는 월롱면 용상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대남방송을 들으며 자랐고 1984년 남한에서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을 DMZ내 대성동에서 인수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고 한달 후인 2월에 이북 실향민 700여명이 도라산역에서 망향제를 지낼때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파주시에서 35년의 공직생활하면서 1950년 전쟁 이후 피난민과 그 후손 베이비부머들이 가졌던 통일에 대한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현 시대를 보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편집자 주>
-게재 순서-
2편,남북화해 분위기 고조
2편부터 4편까지는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남북 간 평화를 위한 대화와 통일 논의 등과 그에 따른 이슈가 되는 사건들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한다.
ㅇ 남북 적십자 회담
1971년 8월 대한 적십자사(남적이라 함)는 북한 적십자사(북적이라 함)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회담을 제의하여 북한 적십자사의 동의로 남북 대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남북 적십자 회담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개최하면서 많은 성과를 가져왔다. 이 회담은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남북 간의 접촉을 열었다는 점이나, 적십자의 인도주의 정신과 동포애의 발로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국가기록원 -7.4남북공동성명 지지와 남북적십자회담 촉구 궐기대회(1972년)
ㅇ 7. 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이후 남한이라고 한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후 북한이라고 한다)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파견되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제정하였다. 당시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다.
나는 ‘야! 이제 뭐가 되나 보다’했다.
ㅇ 1984년의 북한의 대남 수해 지원
DMZ 대성동 북한쌀 인수 / 대한뉴스 1509호 캡처
1984년 8월 31일∼9월 4일 사이 남한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에서는 많은 비가 내려 수많은 인명과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묘소 폭탄테러사건에 대한 화해 제스처로 북적을 통하여 남한에 수해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에 남적은 북측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그 당시는 양측이 체제의 우월성을 다투던 시기로 북측에서는 아마도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제의했는데 남측이 전격적으로 수용하여 북측은 당황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년 9월 29일부터 10월 4일에 이르는 기간에 북한의 지원 물자가 수륙(인천항, 강원도 북평항, 파주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 수량은 쌀(북한은 입쌀이라고 함)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톤, 의약품 14종 등 570만 달러 상당의 물품이다. 북측은 쌀이 부족하여 군 비축미와 연백평야의 벼를 조기 수확하여 구호물자에 충당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미질의 격차가 너무 심해 어떤 쌀은 질이 형편없고 어떤 쌀은 질이 매우 좋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소문은 신빙성이 높다.
육로로는 대성동에서 쌀을 받기로 했는데 그 장소는 대성동 입구로 급히 야적장을 물색하여 조성하였다. 쌀을 받는 날이 9월 30일로 아는데 나도 간 적이 있다. 그들은 과거 도라꾸(화물칸 테두리가 나무로 짜여 있었다)라고 일컫는 차량에 싣고 한꺼번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하역작업을 걱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하차, 상차 시 대한통운의 컨베어벨트 몇 대를 동원하여 짧은 시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차량 및 기계 성능과 작업 시스템에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확인한 것 같다.
나는 하역하는 동안 넥타이를 맨 북측 운전기사와 담배를 서로 교환하여 피우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북측 기사는 ‘모란봉’ 담배를 건네주고 나는 남한 담배를 주면서 일회용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었다. 그 순간 그는 두꺼운 성냥갑을 꺼내 성냥 한 개비로 황에 그으려다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담배를 피우면서 일회용 라이터를 건네주었더니 그냥 주는 거냐고 하여 그렇다고 했더니 좀 그런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였다.
작업이 거의 끝나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때 마침 어느 차량 한 대가 시동이 꺼졌다. 비가 살짝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사는 어디선가 무언가를 꺼내 차량 앞으로 가더니 스타찡을 여러 번 돌려 시동 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인 5, 60년대에 그런 걸 본 일이 있기 때문에 무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성동에 있는 태극기(높이 99.8m)가 그 모습을 전부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북한적십자사 수재민 지원물자(북적물자라고 줄여 불렀다)를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 물자는 해당되는 수재민에게 기준에 따라 정확히 전달되어야하기 때문에 계산도 정확해야 한다. 동료직원은 정확히 계산하기 위하여 소수점 6자리까지 계산하느라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 모습이 꼭 4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실 옷감은 소수점 6자리까지 계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날이 추석 당일이었다.
나는 북한 도라꾸 기사가 준 모란봉 담배를 동료와 피우면서 ‘얼른 마치고 친구들과 한 잔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틀렸다.’ 했다.
ㅇ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1991년 9월 17일(한국시간 18일)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국제적 냉전체제가 이완되자 남·북한의 적대적 대립관계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남한은 1990년 9월 소련과의 국교 수립, 1990년 10월 중국과의 무역대표부 설치 합의(한중수교 1992년 8월 24일) 등 북방외교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한반도가 통일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2개 국가가 되었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 관계를 완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나라가 둘이 되었네!’했다.
ㅇ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2. 2.19일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서명하고,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확인·발효된 남북한이 기본관계에 관한 정부 간 공식 합의 문서이다.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은 했지만 국가 간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는 점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달성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을 하자고 합의했다. 합의 내용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체제 존중, 판문점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운영, 남북 불가침, 남북교류·협력 등으로 축약할 수 있다.
- 다음에 계속 : 3편, 남북화해와 추진과 갈등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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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최초이님의 댓글
최초이 작성일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쓰신 늘푸른(김태회)선생에게 감사드립니다.
장향수님의 댓글
장향수 작성일저도 뭔가 되나 싶다 했습니다.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면서, 결코 싶지 않다는 교훈도 또한 얻었지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