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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 파주에서 본 통일③ -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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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kadmin
댓글 1건 조회 680회 작성일 24-10-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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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인 파주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가 재직기간 동안에 경험하고 느꼈던 통일 이야기이다. 

 

작가는 월롱면 용상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대남방송을 들으며 자랐고 1984년 남한에서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을 DMZ내 대성동에서 인수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고  한달 후인 2월에 이북 실향민 700여명이 도라산역에서 망향제를 지낼때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파주시에서 35년의 공직생활하면서 1950년 전쟁 이후 피난민과 그 후손 베이비부머들이 가졌던 통일에 대한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현 시대를 보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편집자 주>

 

1편, 내가 본 분단의 현장

2편, 남북화해 분위기 고조

3편, 남북화해 추진과 갈등

4편, 남·북·미간의 삼국 화해 노력, 그런데

5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과 도라산역에서의 환상

 


3편, 남북화해 추진과 갈등

ㅇ 김일성의 서울 방남 무산

1994년 7월 25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회담 며칠 앞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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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앙, 지방 정부에서는 김일성이 방문할 코스인 통일로 정비를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물론 남북고위급 회담이나 스포츠교류 등을 위하여 남북이 서로 왕래할 때도 통일로는 주요 통로였다. 

그 후 1994년 자유로가 완공되면서 양쪽 노선을 모두 관리했다. 북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북한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북한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격차가 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처럼 맞은 호기가 이렇게 무산되다니! 아직 통일할 때가 아니여!’ 하고 누군가가 시샘한다고 볼 수밖에. 당시의 이 생각이 단순했는지는 모르겠다.

 ㅇ 2000년 남북정상회담 및 6.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이루어 졌으며 마지막 날 5개 사항이 담긴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union-남북정상회담.JPG

선언 내용은 ①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에 대한 공통점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 1민족 2국가 2정부를 뜻함 ③ 이산가족 재회 등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 ④ 경제협력 등 사회·문화 등 제반 교류 활성화 ⑤ 합의사항 당국 간 대화 개최 규정, 그리고 선언문 끝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명시하였다. 이는 남한의 대북유화정책인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야! 이제 통일이 되나 보다. 적어도 왔다 갔다는 할 수 있겠구나!’했다.

① 6.15공동선언이 있기 전 1998년 11월 18일부터 남한 국민을 대상으로 금강산관광이 시작되었다. 금강산 근처에 관광특구를 지정하고 호텔, 리조트 등 각종 관광 관련시설들을 설치해 운영했다.

그러나 박왕자사건(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 왕자 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사건. 지금까지 확실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으로 남한 정부와 사업권자인 현대아산측은 2008년 7월 13일 금강산 관광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치 않아 시설들은 거의 철거되거나 폐허된 상태다. 최근에는 북한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금강산 인프라를 만들려는 정황이 포착된다.

②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98년 6월과 10월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남한의 통일대교를 거쳐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이는 휴전 이후 민간인 공식 육로 방문이 열린 첫 번째 물꼬가 트인 것이다. 

북한으로 간 소떼는 모두 암소인데 황소들은 난폭해서 오랫동안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01마리의 암소 중 새끼를 밴 암소가 100마리가 넘게 있었으니 사실상은 1001마리보다 많았다. 

1001이라는 숫자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단순히 많은 소가 아니라 ‘1’이 ‘시작’이라는 의미가 담긴 숫자이길 바랐다는 거다. 또 그가 소 한 마리 값을 훔쳐서 재벌이 되었는데 그 동안의 물가 오름세로 봤을 때 그 이자가 1000배는 된다고 계산하고 1000마리의 소와 원금 한 마리를 더하는 것이 맞는다고 여겨 그 숫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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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조성도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1998년 11월 18일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에 이어 2000년도 현대아산과 북한과의 실무협의로 2003년 6월 착공, 2004년 6월 시범단지에 15개사가 입주계약을 체결하고 2005년도부터 입주를 시작하여 약 10여 년 간 운영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8월 한 차례 중단되었다가 2013년 9월 16일 정상 가동되었지만 불과 2년 뒤인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광명성호 도발로 인하여 2016년 2월 10일 박근혜 정부의 대북제재 이행 발표로 가동을 전면 중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성관광도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금강산 관광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이후 약 2개월만인 2007년 12월 5일에 추가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 왕자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그래도 몇 달 간은 더 유지되다가 결국 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 관광도 2008년 11월 29일 불과 1년여 운영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나도 2008년 9월 개성 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개성공단, 개성시내, 집단농장, 박연폭포, 천마산 관음사와 관광상품점의 영업실태 등을 두루 볼 수 있었다. 북한 보위부 소속으로 추정되는 밤색 가죽점퍼를 입은 요원이 우리를 호위하여 서로 대화도 나누면서 같이 다녔는데 그가 탄 짚 차가 ‘현대’산이었다.

개성 시내 고려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속으로 ‘와! 진짜 왔다 갔다 할 수 있네! 곧 뭐가 되긴 되겠다.’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경의선 철도와 문산∼개성 간 도로 잇기 사업은 2000년 6월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경의선 철도(서울∼신의주, 문산∼개성 27.3km) 및 도로(문산∼개성, 12.1km)를 연결하기로 합의하여, 2001년 11월 복구작업을 완료한 후 시범운행도 한 적이 있으나 2008년 12월부터 중단되고 있다.

경의선 철도와 도로의 복원은 남북 간 교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등과 연계한 동남아, 세계로의 물류에 큰 촉진제가 될 것이다. 또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과 남북한 군사적 긴장완화에 커다란 기여가 기대된다.

이에 따라 남쪽의 마지막 역이자 북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인 ‘도라산역’을 2001년 12월 설치하였다. 역 개통(2002년 4월 11일) 직전인 2002년 2월 20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이 침목에 기념 서명도 한 바 있다.

 

한반도 중부와 동부인 경원선과 동해선에서도 같은 차원에서 철도 복원과 역사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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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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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있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서로를 보듬어 따스한 가슴으로 위로할 날이 오겠지요?
"우리가 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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