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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 파주에서 본 통일⑤ - 김태회 향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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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kadmin
댓글 4건 조회 1,570회 작성일 24-10-1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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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현장인 파주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김태회 향토연구가가 재직기간 동안에 경험하고 느꼈던 통일 이야기이다. 

 

작가는 월롱면 용상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대남방송을 들으며 자랐고 1984년 남한에서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을 DMZ내 대성동에서 인수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오고  한달 후인 2월에 이북 실향민 700여명이 도라산역에서 망향제를 지낼때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 

 

파주시에서 35년의 공직생활하면서 1950년 전쟁 이후 피난민과 그 후손 베이비부머들이 가졌던 통일에 대한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현 시대를 보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편집자 주>

 

-게재 순서-

1편, 내가 본 분단의 현장

2편, 남북화해 분위기 고조

3편, 남북화해 추진과 갈등

4편, 남·북·미간의 삼국 화해 노력, 그런데

5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과 도라산역에서의 환상

 

5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과 도라산역에서의 환상

-필자가 예전에 이산가족의 염원과 절박함을 글로 써 푸른 파주라는 파주시청 월간지에 기고하여 게재된 일이 있었는데, 이번 통일과 관련한 이슈가 있어 그 때의 느낌을 다시 소환하여 싣는다.-

2002년 임오년 1월 30일 밤 10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역 넓은 대합실은 수많은 인파로 빼곡히 차 있어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몇 명 안 되는 일행이지만 우리는 말도 전연 통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미아가 될까봐 서로 가까이 붙어 열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남부 유럽 쪽으로 가는 여행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까 서북부 쪽 여행객들만 남았는지 훨씬 줄어든 사람들만 남아 희미한 불빛 아래 책과 신문을 보거나 그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앉아 정해진 열차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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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공기를 가르며 서북부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모스크바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역 플랫 홈의 매서운 바람은 우리의 뺨을 사정없이 도려내었다. 수십 량이나 되는 객차 중 열다섯 번째. 열차표를 객차마다 검표하는 차장에게 내밀고 통과하라는 신호와 함께 얼른 객차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방으로 갔다.

방에는 침대가 위아래로 4개가 있고 짐을 넣는 다락같은 조그마한 먼지 쌓인 공간이 벽면 위에 달려 있었다. 우리들은 이 열차를 타 본 Y선생의 충고에 따라 짐을 풀고 십오 호 객차 차장이 건네 준 담요, 베개와 수건을 몇 십 루불(1루불에 44원 정도)에 사서 자리를 폈다.

 

이런 종류의 열차를 처음 타 봐서인지 방 내부와 침구, 세면장 겸 화장실 등 전반적으로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만 호기심이 나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옆에 정차해 있는 열차도 내다보기도 하느라 부산했다. 옆 열차를 보니까 공간도 넓고 식탁도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탄 열차는 아마 3등 열차인가 보다.

아무튼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까 모스크바 시간으로 밤 열 한 시. 열차는 침침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 플랫 홈을 뒤로 한 채 어둠 속을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가도 칠흑 속에 희끗희끗한 눈빛만이 반복하여 비치고 있었다. 무료해서 사람이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복도에 나와 서성거리니까 옆방 러시아 군인들도 그 옆방 아줌마들도 나와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잡담도 하고 담배도 피우며 궁싯거리느라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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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40도짜리 러시아 보드카를 꺼내어 한 잔씩 마시며 이국에서 갖는 야간열차여행의 흥겨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문뜩 J선생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해서 남서북 쪽의 유럽 여러 나라까지 갈 수 있다지요? 그러면 이 열차를 타고 우리는 노르웨이까지 갈 수 있겠네요?” “아마 그럴걸요. 우리가 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핀란드만을 끼고 핀란드와 경계하고 있는 곳이니까요.”라고 나는 대꾸했다.

“우리 또 한 번 올 수 있겠네요?”하며 J선생은 반은 제의하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별로 오고 싶지 않은데요. 좀 어색하고 불편한 듯해서요.”라고 미국에서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동행한 L선생은 신통치 않게 대답했다. 미국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아 그러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장단에서 개성 쪽으로 14km만 연결하면 통할 수 있다는데...” 라고 나는 말하면서 보드카 한잔을 더했다. 속이 뜨듯해 왔다. “넉넉잡아 5년 안엔 되겠죠. 그때 한번 또 옵시다. 그땐 금촌역에서 타서 노르웨이까지... 아유! 잡시다. 졸려요.” 하며 나는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규칙적으로 흔들어주는 잔잔한 진동과 보드카의 취기, 여독이 더하여 금방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열차의 미동이 저 멀리로부터 차츰차츰 내 귓가로 다가오면서 지금 내가 러시아 열차 안에서 자고 있구나 하는 의식이 돌아오고 이내 내가 덮고 자던 담요가 1층 복도로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장이 노크하면서 러시아말로 무어라 쏼라 대고 간다. 아마 도착할 때가 된 것을 알려준 것 같다.

평양에서 부산까지 되는 거리를 여덟 시간이나 달려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도 역시 추운 것은 마찬가지다. 아니 훨씬 더 추운 것 같다. 우리들은 개찰구 앞에서 민박손님을 유인하는 아줌마들을 뒤로 한 채 예약된 호텔로 가기 위하여 자가용 운전기사와 요금 흥정을 하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보통 택시요금의 1/3이면 이용할 수 있다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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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12일 (임오년 정월 초하루)  설날 아침 11시 조금 못되어 무궁화호 열차 10량은 실향민 700여명을 싣고 52년 전 끊겼던 임진강 철교를 굉음과 함께 기염을 토하며 건너가고 있었다.

임진강 철교와 나란히 서있는 거의 파괴된 또 다른 철교교각은 반세기 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진짜 고향으로 가는 열차인양 박수를 치는 듯 했다.

임진강역을 출발하여 5분여. 남방한계선 최고 가까이 도라산 역에 도착한 열차는 수많은 실향민들을 쏟아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실향민들은 북에 두고 온 내 고향에나 온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덩그러니 세워진 도라산 역 앞으로 몰려들었다.

도라산 역 벌판에서는 통일의 염원을 갈구하는 망향경모제가 치러지고 있었다. 경모제는 작년까지는 임진강둑 망배단에서 지내왔으나 재작년 6. 15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경의선 복원사업에 따라 남측구간을 완료하고 도라산 역을 신설하여 한 치라도 고향이 가까운 곳에서 망향제를 지내자는 뜻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신 저분들은 분명 고향이 북녘일 것이며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그분들의 남녘에서 낳은 자손들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했다. 얼굴에서 또 움직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절실했다. 망연히 북녘을 바라보시는 분에 간혹 눈물을 흘리시는 분에 앞으로 더 깔아야 할 침목에 염원을 담느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2, 3세대들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부모님의 한을 이해하는 듯 성심껏 모시느라 애쓸 뿐이다.

경모제가 다 끝나가고 열차에 오를 시간인데 망설이는 그 어르신들을 보면서(몇 분은 행방을 찾을 수 없어 결국 발차시간이 30분 이상 지연되었음) 문득 며칠 전에 탔던 러시아 야간열차에서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노르웨이까지 갈 수 있겠네요?”, “우리 또 한 번 올 수 있겠네요?”, “장단 쪽에서 개성 쪽으로 14km만 더 연결하면...”, “넉넉잡아 5년 안엔 되겠죠, 금촌역에서 타서 노르웨이까지...” 등 그 열차 안에서 몇 마디 주고받은 말들이 도라산 역 벌판 바람에 휘익 소리를 내면서 자꾸자꾸 지나간다.

우리는 왜 이럴까. 이념이 잔존해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종주국인 구소련의 모체인 러시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니고 있는데... 내 부모, 내 형제, 내 말을 쓰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이면서도 반세기를 넘기고 있으니... 이웃나라들이 시샘을 해서일까. 우리가 못나서일까.

“넉넉잡아 5년 안엔 되겠죠.” 라고 말했던 나는 저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일자 왠지 불안한 마음에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 2002년 3월(푸른 파주지 기고문)호 -

이 글의 끝에 “저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라고 적었는데, 22년이 더 지난 지금 또 다시 “그 할아버지가 혹여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면….”이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의구심 단계는 훨씬 넘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나를 앞지른다. 동시에 우리의 염원은 님과 헤어져 점점 멀어져가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사라지면서 희미한 잔영만 남기듯 까마득히 환영만이 아른거리는 것 같아 너무 허망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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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회 향토연구가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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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회님의 댓글

김태회 작성일

-김태회 향토연구가-

글을 끝내고 보니까 진짜 허망한거예요. 무책임하다고할까. 앞으로 가야만 하고 희망을 저버리면 안될 것같아요. 진행중이니 다음에 이어질 여지를 남겨야할 것같기에. 맨뒤에 "그런데...."를 덧붙이고 끝내면 언젠가 이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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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이님의 댓글

최초이 작성일

부모님이 6.25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고향에 가족이 있습니다. 언젠가 고모님, 이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상이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 권력을 가진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나라를 둘로 갈라 놓아
마음대로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가요. 그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밥 먹고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벌써 그 시간이 70년이 넘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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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향수님의 댓글

장향수 작성일

남북관계 중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던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것처럼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이었죠. 여러가지 이유로 헤어지고 일생 그리움에 눈물만 흘리신 분들... 지금쯤 하늘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웃고 있으시겠죠. 가슴이 먹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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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현님의 댓글

성석현 작성일

기억과 감회, 사료를 더해 너무 생생함으로 닥아옵니다.
수려한 글을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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