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특집] 누가 있어 그 아픔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프로필
파주시청 공식블로그

2020. 2. 27. 15:33

이웃추가

[삼일절 특집] 누가 있어 그 아픔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 파주의 독립운동사와 태극기 마을 조성 배경 -

3·1운동 발발 101주년이 되었다. 우리가 오늘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께 감사하며 1919년 파주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사를 되짚어 보고, 광탄면 발랑리 태극기 마을과 파주독립광탄공원의 조성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파주의 독립운동사는 국가기록원에 명시된 조선총독부 자료(경성복심법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를 토대로 하고, 광탄면 발랑리 태극기마을 조성에 관해서는 이를 주관한 남상철(독립운동가 남동민의 조카) 전 노인회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한다.

(좌)남상철 전 노인회장 / (우)태극기 마을 안내판

(좌)파주독립광탄공원 전경 / (우)파주독립광탄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비

파주의 독립운동사

파주에서의 독립운동 시기는 한일강제합병 즈음부터 광복 직전까지로 파주 전역에서 장기간 이루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다 연행돼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는 모두 35인(연행 당시 본적지, 주소지가 파주인 인물)으로 다수의 인물이 체포되었던 1919년 3월 항쟁에 초점을 맞춰 소개한다.

황유현(黃裕顯, 당시 61세, 천현면 법원리)은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선언서 및 조선독립신문을 서울에서 가져와 주민에게 읽어주고 독려, 24일 *소사들을 마을에 보내 주민을 규합, 25일 천현면사무소에 모인 주민 400여 명을 지휘, 26일 700명을 이끌고 문산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 소사: 관청,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

그해 3월 교하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때 체포된 인물은 임명애, 염규호, 김선명, 김창실, 김수덕, 김수진이다. 임명애는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00여 명의 학생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외치게 하고, 25일 염규호 집에 집결, 26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고자 결의, 출판물을 발행하고 김창실이 배포하였다.

(좌)임명애 지사 / (우)파주 교하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파주에서 가장 큰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은 1919년 3월 28일이다. 이를 주도한 이들은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정봉수, 정시화, 강홍문 등 광탄면 발랑리 주민들이다. 정시화는 이날 시위 중 순국하였다. 당일 연행된 모든 이들이 광탄면 발랑리 주민들이다. 독립운동가 남동민의 조카인 남상철(발랑리 전 노인회장)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다.

누가 있어 그 아픔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후 3월 27일 광탄면사무소에 몇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다음 날 공릉장터(현 봉일천 시장)에 1천여 명이 모였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우리 마을(발랑리) 사람들이다.

광탄에서 출발해 고창마을 모퉁이를 돌 무렵 일본 경찰들의 총격에 6명이 돌아가셨다. 광탄면 주민 3명과 발랑리 주민 3명이었다. 당일 주동자로 잡혀간 9명이 모두 발랑리 주민들이며 복역 중 옥사한 이도 있고, 출옥 후 대부분 마을을 떠나 이러한 사실들이 오랜 시간 묻혀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해방되기까지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만세운동을 하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어디서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었고, 감시가 심하니 누구든 그들과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그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만 했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은 후손을 남기지도 못했다. 옥고를 치르기 전에 자손을 낳은 경우만 대가 이어졌으니 그때 다녀온 분 중 4명이나 대가 끊겨 버렸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불과 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났다. 과거사를 밝혀내고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까지 몇십 년이 걸렸으니 이미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세탁된 이후였다. 누가 있어 그 아픔을 기억하고 밝혀냈겠는가?

광탄면 행정복지센터 내 광탄면 삼일운동발상비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

전설처럼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1992년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양자로 들어간 어느 분의 아들이 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독립투사관련 판결문을 찾아낸 것이다. 공식적인 자료를 찾아낸 후 마을에서 그분들을 위한 기념비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실제 추진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다 될 것 같던 일도 막바지에 틀어지고 그렇게 또 20여 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2010년 365개의 게양대를 세우고 1년 내내 태극기를 게양해 태극기 마을을 만들자는 의견이 다시 거론됐다. 예산지원이 될 줄 알고 자재를 모두 준비했으나 또 무산되었다. 방송국에서까지 오기로 했는데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주저앉으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아 그때 내가 1천만 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설날 자녀에게 받은 용돈까지 내놓으며 기꺼이 동참했다. 몇만 원에서 몇백만 원까지 이 작은 동네에서 그렇게 모은 돈이 무려 4천만 원이었다.

태극기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다음 단계의 일이 시작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한 3월 27일을 기해 매년 희생된 9인의 추모제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9인분의 제기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제기를 만드는 모 회사의 대표가 우리의 의도를 알고 흔쾌히 도와주어 부족한 비용으로나마 제사 도구를 준비하게 되었다. 독립투사들의 영혼이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좌)독립운동가 남동민 기념비 / (우)독립운동가 남동민 묘역

기념공원이 들어서기까지

태극기 마을이 들어설 무렵 마을에 기념공원을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150여 평의 땅을 기증해주신 고마운 분이 있어 경로당 옆에 무궁화를 심고 태극기 마을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했다. 기념공원을 만들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또 걸렸다.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형님과 내가 400평의 땅을 기증해 ‘파주독립광탄공원’을 만들었다. 기념비를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하기까지 여러분의 도움이 함께 했다. 』(남상철 전 회장의 증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선조의 자취를 알리기가 힘들다. 광복이 되고 전쟁을 치른 후 사는 것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과거사가 정리되기 시작했으니 상당히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었을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희생되었거나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둔 이들, 객지를 떠돌다 생을 마감해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선조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라도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바란다.

3·1운동 관련 발랑리 주민 판결문

○ 파주독립광탄공원 위치: 경기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42

취재: 김순자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