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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의 공릉천은 지금의 금촌, 교하, 운정, 탄현 지역을 통과 하고 삼국시대부터 교하군 관할 구역이었다. 이 구역을 담당하는 관아는 시대마다 위치가 다르지만 탄현면 갈현리에 있던 관아가 1733년 지금의 금촌으로 이전했다. | | 파주의 공릉천은 지금의 금촌, 교하, 운정, 탄현 지역을 통과 하고 삼국시대부터 교하군 관할 구역이었다. 이 구역을 담당하는 관아는 시대마다 위치가 다르지만 탄현면 갈현리에 있던 관아가 1733년 지금의 금촌으로 이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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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릉동 지역은 공릉천에 인접하면서 나루터가 있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금성진(金城津)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다른 고지도에서는 금성포, 금척진, 금척포진이라고도 불렀다. | + | 교하지역과 인접한 금릉동 공릉천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대동여지도에 금성진(金城津)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다른 고지도는 금성포, 금척진, 금척포진이라고도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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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성진 나루터는 상선이 드나 들던 곳으로 큰 창고가 있어 대창골이라는 불리는 자연부락이 있었고 현재는 교하향교가 금릉동에 현존하고 있다. 이 곳 나루터는 매년 홍수로 금성천 하상이 매몰되자 상선배가 지금의 금릉역 부근의 쇠곳나루((金串津)으로 이전하여 정박하게 되었다. | + | 금성진 나루터는 상선이 드나 들던 곳으로 큰 창고가 있어 대창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고 현재는 교하향교만 금릉동에 남아 있다. 이 곳 나루터가 매년 홍수로 하상이 높아지자 상선배는 지금의 금릉역 부근의 쇠곳나루((金串津)으로 이전하여 정박하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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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곳나루는 지금의 금촌1택지 북단의 은행나무 있는 곳으로 교하와 금촌을 오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상선배가 정박하자 지역일대에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 | 쇠곳나루는 지금의 금촌1택지 북단의 은행나무 있는 곳으로 교하와 금촌을 오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상선배가 정박하자 지역일대에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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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부터 모를 길러 논으로 이앙하는 재배법이 도입되면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관개시설의 설치는 수세를 징수하고 농지를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되었다. | + | 조선시대부터 모를 길러 논으로 이앙하는 재배법이 확대되면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관개시설은 수세를 징수하고 농지를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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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릉천 하류이었던 조리, 금촌, 교하, 탄현은 평야지대로 영농시기에는 용수공급을 위해 저수지나 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중 공릉천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감초하천 구역이라 하천 여러 곳에 보가 설치됐다. | + | 공릉천 하류었던 조리, 금촌, 교하, 탄현은 평야지대로 영농시기에는 용수공급을 위해 저수지나 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중 공릉천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감초하천 구역이라 하천 여러 곳에 보가 설치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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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교하현 관할이었던 탄현 갈현평야에는 영친왕궁보가 있었고 근처에 능거리보 또는 영천보라고 불리던 방천보를 서울 거주 홍순모가 1911년에 만들었다. 맥금리에는 김수교 리중 소유의 갈방축평보가 있었고 청룡두천이 합류되는 입구에 연다메보라 불리는 '중보'가 설치되어 방천보 몽리구역에 포함됐다. | | 당시 교하현 관할이었던 탄현 갈현평야에는 영친왕궁보가 있었고 근처에 능거리보 또는 영천보라고 불리던 방천보를 서울 거주 홍순모가 1911년에 만들었다. 맥금리에는 김수교 리중 소유의 갈방축평보가 있었고 청룡두천이 합류되는 입구에 연다메보라 불리는 '중보'가 설치되어 방천보 몽리구역에 포함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