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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역원驛院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주정소로 사용됐다. | + |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院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주정소로 사용됐다. |
| | [[File:1770년팔도지도-번역.png|400px|섬네일|1770년경 팔도지도]] | | [[File:1770년팔도지도-번역.png|400px|섬네일|1770년경 팔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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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6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분수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 | 136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분수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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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것이 분수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분수원은 관리들이 경유하는 역원으로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했다. | + | 이것이 분수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분수원은 관리들이 경유하는 원으로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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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이 건국되자 분수원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교통 시설로 바뀌면서 의주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원의 역할을 했다. | | 조선이 건국되자 분수원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교통 시설로 바뀌면서 의주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원의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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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칭 변화== | | ==명칭 변화== |
| − | 분수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焚修院분수원'이라고 불렸다. 이 이름의 '분수'는 향을 피우고 도를 닦는다는 뜻으로, 당시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의주로를 오가는 통행객에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 + | 분수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焚修院분수원'이라고 불렸다. 이 이름의 '분수'는 향을 피우고 도를 닦는다는 뜻으로, 당시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의주로를 오가는 통행객에에게 숙박를 제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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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인 1656년, 『동국여지지』에서는 '分水院분수원'으로 표기됐다.. 이전의 '焚修院분수원'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보다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불교적 색채를 지우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 | 조선 중기인 1656년, 『동국여지지』에서는 '分水院분수원'으로 표기됐다.. 이전의 '焚修院분수원'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보다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불교적 색채를 지우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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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과 역할 == | | ==기능과 역할 == |
| − | 분수원은 시대에 따라기능과 역할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전형적으로 사찰에서 운영되는 역원으로 통행객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발굴된 용미리 혜음원의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 + | 분수원은 시대에 따라기능과 역할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전형적으로 사찰에서 운영되는 원으로 통행객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발굴된 용미리 혜음원의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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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수원은 승유억불 정책에 따라 분수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관료를 위한 공식적인 숙박 시설로 전환 된 것이다. 특히, 영조가 장릉에 참배하러 갈 때,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할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 |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수원은 승유억불 정책에 따라 분수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관료를 위한 공식적인 숙박 시설로 전환 된 것이다. 특히, 영조가 장릉에 참배하러 갈 때,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할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