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광무3)에 편찬된 경기도 교하군 읍지이다.
개요
교하군은 현재 행정구역상 파주시 금촌과 탄현, 조리 지역에 해당한다.교하는 본래 고구려때 천정구(泉井口)라 불리던 지역으로, 통일신라때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고려 현종대에 양주(楊州)로 편입되었다가, 조선 태조대에 이르러 독립하였고 태종대에 현(縣)이 설치되었다. 영조대에 이르러 인조와 그 비의 능인 장릉(長陵)을 교하로 옮김에 따라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본 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교하 지역의 여러 면모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읍지에 기록된 호구와 전결의 수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교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읍세를 지닌 고을로 나타난다.
읍지를 통해 교하의 면리 구성, 도로, 건치연혁, 고을명, 산천, 거주 성씨, 풍속, 능침, 단묘, 묘소, 관아, 제언, 창고, 토산물, 교량, 역원, 봉수, 사찰, 고적, 인물, 호구수 및 토지결수, 부세 내역, 관아 재정 관련 정보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본 읍지는 앞서 제작된 읍지를 저본으로 하되, 19세기 말의 변화된 상황을 충실히 반영해 기록을 수정 보완하여 만든 자료이다. [1]--2025년 4월 13일 (일) 04:00 (KST)
도서 내용
1899년(광무3)에 편찬된 경기도 교하군 읍지이다. 1책 8장 분량의 필사본이다.표지에 편찬 시기가 광무(光武) 3년 5월로 명기되어 있고, 본문 말미에 교하군수(交河郡守) 박주헌(朴周憲)의 이름과 ‘교하군수지장(交河郡守之章)’ 및 ‘교하군인(交河郡印)’이 있다. 동시기에 편찬된 타지역 읍지들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점으로 볼 때 본 읍지는 당시 전국에 내려진 읍지상송령에 따라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지는 방리(坊里), 도로(道路),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風俗), 능침(陵寢), 단(壇), 묘(墓),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애(關阨), 봉수(烽燧), 누정제영(樓亭題詠), 사찰(寺刹), 고적(古跡), 진보(鎭堡), 인물(人物),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역(均役), 상납(上納), 봉름(俸廩), 군병(軍兵), 사환(社還)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리 기록에 따르면, 교하군에는 후율포(朽栗浦)를 기준으로 남쪽에 4개 면(지석면(支石面)·와동면(瓦洞面)·석곶면(石串面)·청암면(靑巖面)), 북쪽에 4개 면(현내면(縣內面)·신오리면(新五里面)·탄포면(炭浦面)·아동면(衙洞面))이 있었다. 서두에 호구(戶口)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8개 면의 총 호수는 2,673호, 전체 인구 10,493구 중 남자가 5,664구, 여자가 4,829구였다. 이 같은 통계수치의 기준연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어 각 면별로 사계(四界)와 호구수, 소속 리(里)들의 이름 및 그 위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방리 항목 말미에는 폭원(幅圓) 기록이 나온다. 교하군이 동서로 30리, 남북으로 30리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도로 항목에서는 서두에 장릉(長陵)을 기준으로 한 도로 정보가 특별히 수록된 점이 눈에 띈다. 이어 관문(官門) 기준의 도로 정보가 나온다. 동쪽으로 파주(坡州)까지 10리, 북쪽으로 장단(長湍)까지 25리, 서쪽으로 풍덕(豊德)까지 20리, 서쪽으로 통진(通津)까지 15리, 남쪽으로 김포(金浦)까지 15리, 동남쪽으로 고양(高陽)까지 15리였고, 동쪽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80리였다.
건치연혁에 따르면, 교하는 고구려때 천정구(泉井口)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때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고을의 지세가 강과 하천이 교류하는 양쪽 사이에 있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고려 현종 9년(1018) 양주(楊州)로 편입되었다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이르러 독립하여 감무(監務)가 두어졌다. 태종대에 현(縣)이 설치된 이래, 숙종대에 죄인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한 차례 폐현되었다가 복현되는 일을 겪었다.
영조 7년(1731)(읍지에서는 ‘영조 9년’으로 오기) 인조와 그 비의 능인 장릉(長陵)을 교하현의 옛 치소(治所) 자리로 옮김에 따라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읍치는 아동면 금성리(金城里)로 옮겼다가, 다시 지석면 후율리(朽栗里) 지역으로 옮겼다. 군명 항목에는 선성(宣城), 천정구, 굴화(屈火), 원정(原井)이 소개되어 있다. 관직 항목을 보면 교하군수는 정4품 음관직(蔭官職)이었다. 훈도(訓導),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은 모두 없어졌고, 향장(鄕長)이 갑오년(甲午年: 1894년) 이후 신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천 항목에는 읍치의 진산(鎭山)인 장명산(長命山) 등 산 8곳을 비롯하여 고산천(高山川), 금성진(金城津), 후율포(朽栗浦), 낙하도(洛河島) 등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다. 능침 항목은 장릉에 대한 기록이다. 읍치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본래 파주 지역에 있다가 교하 검단산(黔丹山) 동쪽 기슭으로 이장하였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또한 묘 항목을 보면 여러 명사들의 묘소가 교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희(黃喜), 윤선거(尹宣擧), 이건명(李健命)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단 항목을 통해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여단(厲壇)이 모두 읍치에서 서쪽으로 1리 지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해 항목에는 객사(客舍)와 아사(衙舍), 창고 항목에는 사창고(司倉庫)와 군기고(軍器庫)가 나온다. 제언 항목에는 4개 제언의 위치와 둘레, 수심이 적혀 있는데, 관개 범위의 토지를 현재 민들이 모두 경식(耕食)하므로 집결(執結)하여 승총(陞摠)했다는 기록이 말미에 덧붙여져 있다. 누정제영 항목은 해당 사항 없음으로 적혀 있고, 사찰 항목에는 검단사(黔丹寺) 등 3곳이 소개되어 있다.
인물 항목에는 교하를 대표하는 명사, 효자, 열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간략한 인적 사항 및 행적이 담겨 있는데, 세종대 우의정까지 지낸 노한(盧閈), 그 손자로서 성종대 저명한 관료이자 학자인 노사신(盧思愼)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읍지 뒷부분에는 사회경제적 부문의 정보가 집중 수록되어 있다. 교하군의 토지결수 및 부세 내역 등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으며, 19세기 말의 변화된 상황을 기록에 충실히 반영한 점이 주목된다. 한전과 수전 항목에 따르면, 한전은 원장부(元帳付) 716결 35부 5속으로 이 중 시기결(時起結)이 544결 24부 7속이었고, 수전은 원장부 1,232결 36부 4속으로 이 중 시기결이 796결 46부 9속이었다.
이 같은 수치가 어느 해에 파악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진공은 모두 폐지된 것으로 나타나며, 환곡 운영과 관련된 조적 항목에 역시 말미에, 이상의 내용은 모두 폐지되었고 탁지부(度支部)조에 사환미(社還米) 100석을 을미년(乙未年: 1895년)에 파주로부터 옮겨왔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전세, 대동, 균역 항목 또한 기존의 내역을 전재한 다음,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을 말미에 덧붙였다. 상납 항목에는 결전(結錢)과 호전(戶錢) 내역이 적혀 있는데, 이는 갑오년에 새로 마련된 것이라는 기록이 말미에 나온다. 관아 재정과 관련된 봉름 항목에도, 기존의 것은 모두 폐지되고 갑오년 이후 신정식(新定式)에 따라 금(金) 700원이 마련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교하군에 배정된 군병 및 보인(保人)의 숫자를 적은 군병 항목에도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이 말미에 보인다. 교하 읍지는 본 읍지 외에도 몇 종이 더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수록본, 19세기에 나온 읍지로서 1842년~1843년의 『경기지(京畿誌)』와 1871년의 『경기읍지(京畿邑誌)』 수록본 등을 꼽을 수 있다. 읍지의 구성으로 볼 때 본 읍지는 19세기에 앞서 편찬된 읍지를 저본으로 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소장의 또 다른 『교하군읍지』(古 915.12-G999h)는 본 읍지와 동일한 읍지이다.[2]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