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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 (일) 20:49 기준 최신판
중앙도서관 시민채록단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군 주둔으로 달라진 문산읍 선유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 여기, 선유리'는 1950년대 이후 선유리에 거주하고 있는9명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마을 이야기를 기록했다.--2022.9.9.
발간 정보
이 문헌은 파주중앙도서관에서 2022.9.1일 165쪽 분량으로 발간했다. 내용은 강미경, 고정희, 김선희, 정숙희, 허경숙, 인용민 등 6명의 채록단이 글을 작성하고 사진 홍창섭, 편집 천승희, 디자인 왼끝 맞춘 글 하재민, 인쇄제본 지아이피앤피에서 담당했다.
이 이외에도 선유리 마을을 신영, 구슬기, 권인숙, 김영길, 김철숙, 박은영, 박현숙 등이 스케치해 문헌에 담았다. 중앙도서관은 2022.9.15일 오후3시 문헌 발간에 따른 전시회를 선유리에서 개최한다.
문헌 구성
문헌에는 1950년대 이후 거주했던 선유리 주민 9명의 인터뷰와 선유리 마을에 대한 소개가 담겨져 있다. 9명의 개인별 채록 내용 중 가장 특징 있는 글만 추출해서 소개한다.
두 번째 고향 선유리
선유리 주민 길귀열 씨 (글 강미경)
길귀열 씨는 1943년 충청남도 금산에서 가난한 집안의 삼남매 막내로 세상과 마주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다.
네살까지의 기억은 배가 고팠다는 것만 있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금산에서 형이 있던 파주 용주골로 왔다.
미군부대 PX에서 산 팩큐리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여 남기는 사진을 찍으며 선유리의 시간을 담을 수 있었다.
사진이 좋아 사람이 좋아 사진을 직업으로 선택하면서 가끔은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선유리에 서린 내 삶
선유리 주민 김낙철, 정계순 부부 (글 강미경)
아홉 살에 선유리와 인연을 맺어 삼십 년 가까운 세월 ‘김낙철’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선유4리 김 반장’으로 통했다. 아홉 살부터 시작된 선유리에서의 일상을 기억으로 만들며 억센 가 난의 칡넝쿨을 걷어내며 악착같이 살았다.
가난이 일상이었던 속에 서도 늘 곁엔 사람들이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해내며 그동안 뭉 쳐놓았던 삶을 한 올씩 풀어냈다.
김낙철 씨는 기억 부자다. 가난을 벗는데 급급하느라 행복도 모르고 살면서 온 몸 에 골병을 선물해 준 초년 고생도 괜찮다는 말 속엔 편안함이 있었 다.
여전히 행복이 뭔지 모른다고 말하는 입가에 피어나는 엷은 미 소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나는 선유리 토박이
선유리 주민 김근회 씨 (글 김선희)
마을 주민 김근회씨는 1956년부터 이 마을에 산다. 칠정마을에서 내려오는 개울가 에서 멱을 감고 한국전쟁으로 주둔하게 된 미군부대 군인들에게 츄잉 껌과 씨레이션(C-레이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투식량)을 선물로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앞마당은 버스가 돌아서 나갈 정도로 빈 공간이 있는 곳이었는데 기지촌에 필요한 상점들도 가득 찼다가 지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역이 되었다.
선유4리는 소방도로 하나 없는 마을로 남았다. 전통시장을 만들 때 소방도로 하나쯤은 해놓았어 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지금도 아주 오래된 곳처럼 머물러 있다. 변하지 못하는 마을은 이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을 씁쓸하게 만든다.
지금도 응원한다, 선유4리
선유리 주민 김성천 씨 (글 김선희)
김성천 씨는 1945년 3월 28일에 태어났다. 지금의 문산읍행정 복지센터 자리에 임시천막으로 시작된 문산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는 김성천 씨가 졸업 후 1년 후에 지금 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학교라고 하지만 판자 학교였다. 2개 반이 운영되며 60여 명이 같이 다녔다.
시장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10여 년 전 에 퍼지면서 시장 상가를 대부분 서울 사람들이 사놓은 것이다. 자 신이 살지도 않고 재개발되면 건물을 올리겠다는 욕심으로 사놓 은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면서 비가 오고 눈을 맞으며 세월의 흔적 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선유리와 함께 40년
은혜문구 김진호, 우월순 부부 (글 허경숙)
“부천에서 결혼하고 살다가 남편 후배가 문산 선유리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따라왔어요. 처음에는 연고도 없고 돈도 없어서 고생을 엄청나게 했어요. 가게도 장사가 잘 되면 주인이나가라고 해서 이사도 여러 번 했구요. 이거 다 이야기하다 보면 울지도 몰라요.”
김진호, 우월순 부부는 미군들이 철수하는 바람에 그들을 상 대로 하던 침대 장사를 접고 문방구로 업종을 바꿔야 했다.
그러 나 최근에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번 에는 업종을 바꾸는 대신 늘 하던 대로 여전히 은혜문구의 아침을 깨운다.
50년 지켜온 제2의 고향, 선유리
문산유리샷시 박성근 씨 (글 허경숙)
박성근 씨는 평택이 고향이다. 어떻게 파주로 오게 되었는지 는, 너무 어렸을 때라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덩달아 움직인 것 외에 는 달리 생각나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이 치러지는 동안에 부모님을 잃었고 그후 작은할아버지 손에 자 랐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지나 지금까지 선유리를 지키고 있는 박성근 씨는 활황기 였던 과거를 돌아보며 미군들과 나누었던 개인적인 우정을 돌아본다.
박성근 씨가 젊었을 때는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미군들도 많아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클럽으로 가 서 내기 당구를 치면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땐 그랬지
미군부대 군속원 양재영 씨 (글 허경숙)
재영 씨는 1961년 9월 29일 해군으로 제대했다. 처음 입대 당시에 는 ‘에스티’라는 직업군인에 지원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사관은 누구나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일정한 기간을 채우면 자동 승진 이 되고 약속한 6년의 기간이 지나면 제대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 었다.
당시에 일인당 5병의 술을 살 수 있는 티켓이 미군들에게 배 부되었는데 그걸로 양주를 사서 다른 소비자에게 팔고 남은 차액 으로 부족분을 채웠다.
양주 판 이익금으로 양주 대신 소주나 라면 을 사다 먹는 일도 흔했다. 왜냐하면 식비가 군봉에 포함되어 있어 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일단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부족한 경 우에는 라면으로 때우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낯섦에서 익숙한 음식이 된 자장면 같은 이웃
중국음식점 영화원 우경발, 왕숙진 부부 (글 고정희)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저기 저 화교학교가 있는 명동. 여기가 기지촌이라 (음식 장사 하려고) 온 거죠. 그 왜냐면 저 아 버님이 남의 집 (일하러) 다니면서 음식점 열려고 음식도 좀 배 우고 만들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학교 다니려면 일단 서울 쪽 에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아버님이 ‘이제는 나도 이제 돈 벌어 보겠다’ 그러고 아버님이 (선유리로) 가는데, 우리도 따라 나와 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이 선유4리에 왔던 거야 이게. 그 당시 에 미군부대 이런 데 돈 진짜 많이 벌었죠, 그때는.”
1980년대부터 말이 나온 도로 확장으로 인해 가게 건물이 철거된 다고 했지만 철거가 연기되다 개천 쪽으로 길이 나서 안도했다. 그러 다 몇 년 전부터 다시 철거 얘기가 나왔다.
그 사이 건물 주인도 몇 번 바뀌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법원리에서 처음 음식점을 열었을 때처럼 내몰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미싱을 밟듯 삶도 주체적으로
충현세탁소 이충현 씨 (글 정숙희)
이충현 씨(67세)는 처음 양복점 문을 연 뒤 사십 년째 선유리를 지키고 있다. 선유리 칠정말(지금의 선유6리)에서 미군부대 탱크와 비행기를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선유리 골목에서 신문 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 었다. 문산에서 미군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와 스물다섯 살부터 선유리에서 양복점을 운영했다.
이충현 씨는 삶의 주요 변곡점을 한국의 역사에 맞춰 기억하고 있다. 양복 기술을 배우던 때 74남북공동성명이 있었고, 군입대할 때 무 하마드 알리가 방한했으며, 양복점 개업할 때는 10.26사태가 일어났 고, 프로야구가 창단된 해 야구장에서 아내와 첫 데이트를 했다.
큰딸은 아시안게임 때 태어났고, 88올림픽 때 세탁소로 바꾸고 둘째를 낳았으며, 1993년 대전엑스포 때 셋째를 낳았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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