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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7일 (금) 16:36 판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일원에 있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능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3호로 지정됐다.

장릉, 사진 파주시

개요

조선 제 16대 왕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와 원비 인열 왕후(仁王后) 한씨(1594~1635)를 합장한 무덤으로 1731년 문산읍 운천리에서 갈현리로 옮겨 왔다. 2009년 6월 27일 조선시대 왕릉 40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pi2023.2.17.

운천리 능 설치

선조의 원비인 인열왕후 한씨는 1635.12.9일 출산후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의 안장됐다. 인조는 1649.5.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고 1649.9.20일 운천리 인열현왕후 능 왼쪽에 예장됐다. 그 자리는 인조가 생전에 능지로 지목했다고 한다.

갈현리 능 이전

1731.3월 선조때 능 이전 논의가 있었던 것과 묘지에서 뱀이 또아리를 트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장을 논의했다. 영의정 홍치중은 1731.5월 묘를 이장할 곳의 풍수를 조사하여 보고하고 영조는 능 이전을 승인했다.갈현리로 이전하면서 능은 조리의 영릉의 기준에 맞추게 하고 1731.8.16일 묘를 개장하고 1731.8.30일 갈현리에 이장을 완료했다.

능의 시설

능의 석물구조는 봉분 아래 로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바깥으 로 돌로 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 석(床石) 2좌(座)를 배치하여 2위(位)임 을 나타냈다. 상석 중앙 정면에 장명등 과 양쪽에 망주석 2기를 배치하였고 그 아래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1쌍씩 세웠다. 봉분 주위로는 석마(石馬), 석 양(石羊), 석호(石虎)를 각각 2필씩 배치해 능을 호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봉분을 감싸는 12면의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神)과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지만, 장 등의 병풍석에는 모란문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이와함께 8각형의 장명등에도 목련 과 연화문을 조각해 넣었는데 이는 18세기 능의 석 물 문양이 갖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된 것으로 보인 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수 복방(守僕房)이 위치하고 있으며 재실은 홍살문의 동남쪽 작은 길 옆에 위치하고 있다.

여론 여담

인조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1595년 임진왜란 중에 출생했다. 1607년 능양도정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으로 됐으며 광해군15년(1623)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27년 동안의 재위기간 중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봉림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치욕을 당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당파간의 싸움이 격화되어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인조 27 년(1 649)에 사망했다.

인열왕후

인조의 비 인열왕후 한씨는 한준겸의 딸로 1610년 능양군과 혼인하였고 인조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효종과 소현세자, 인평대군, 용성 대군의 4 형제를 낳았으며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후 사망 관련 문책

인혈왕후는 1635.12.4일 여섯째 대군을 출산했으나 바로 사망했고 5일 후에 인열왕후도 산실청에서 사망했다. 인조는 인열왕후를 간호했던 의관들을 문초하였으며 인열왕후의 출산을 도왔던 봉보부인 응옥(應玉)을 유배했다.

왕의 시호 거부

인열왕후의 시호는 인열(仁烈)로서 '인(仁)은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열(烈)은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뜻이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란 시호를 내리길 원했으나 대사헌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고 하여 인열로 정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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