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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1963년 1월 21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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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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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의 ‘파주지도’에 보이는 ‘미륵현’은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을 말한다.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ref>중부일보 2017.4.30. 조선후기(12) 의주대로와 연행노정</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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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1일 (월) 14:53 판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93호 파주용미리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

마애이불입상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위치한 용암사(龍岩寺) 경내에 위치하여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쌍미륵 석불입상으로 천연바위벽을 이용하여 제작했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그 위에 목, 얼굴,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았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원립불, 圓笠佛)은 목은 원통형으로 당당한 가슴을 드러냈으며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는데 양쪽으로 내려진 옷자락이 섬세 하게 표현했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불상(방립불, 方笠佛)은 합장한 손 모양만 다를 뿐 조각된 수법은 왼쪽의 불상과 비슷하다.

전설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해 진다. 고려 시대 선종(宣宗)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어느날 밤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 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기슭에 있 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다.

꿈에 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바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왕께 고하기를 “장지산 아래 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바로 장지산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었고, 절이 지어진 후 원신궁주와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해 온다.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1872년 지방지도의 ‘파주지도’에 보이는 ‘미륵현’은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을 말한다.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2]

               -이해응(1775~1825)-

曇雲如浪護山頭
물결같은 흐린 구름 산 머리를 지키는데

石佛分身幷兩肩
돌부처 분신하여 두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萬劫風磨猶卓立
만겁을 바람에 갈리면서도 그대로 우뚝서서

懸應太始上干天
멀리 태초와 호응하여 위로 하늘을 지른다.

자료 출처

  1. 위키백과사전
  2. 중부일보 2017.4.30. 조선후기(12) 의주대로와 연행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