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 (→생애) |
|||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6번째 줄: | 6번째 줄: | ||
==생애== | ==생애== | ||
− | 옥봉은 양녕대군의 | + | 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 이봉(李逢·1526~?)의 서녀로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은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아낌 없이 사주었다. |
옥봉의 호도 아버지 이봉이 옥돌이 솟아 오른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직접 만들어 주었다. | 옥봉의 호도 아버지 이봉이 옥돌이 솟아 오른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직접 만들어 주었다. | ||
141번째 줄: | 141번째 줄: | ||
==관련 정보== | ==관련 정보== | ||
===링크 모음=== | ===링크 모음=== | ||
+ | *[https://www.okh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57 옥천향수신문] | ||
+ | *[http://photo.paju.wiki/pkstorage/repository/지역사/이옥봉시인.pdf 여류시인 옥봉을 찾아서, 성지오] | ||
'''주변 명소''' | '''주변 명소''' |
2024년 3월 2일 (토) 01:13 기준 최신판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불리며 광탄면 용미리에 임천조씨 묘역에 묘비가 있다.
개요
본명은 이숙원(李淑媛, 생몰미상)이고 호가 옥봉(玉峯)인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선조 때 옥천군수를 역임한 이봉의 딸이며 운강공(雲江公) 조원(趙瑗)의 소실(첩)이다. 옥봉의 작품이 임천조씨 가문에서 발간한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시 32수가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생애
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 이봉(李逢·1526~?)의 서녀로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은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아낌 없이 사주었다.
옥봉의 호도 아버지 이봉이 옥돌이 솟아 오른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직접 만들어 주었다.
서녀로 태어나 양반가에 첩으로 시집을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옥봉은 '왕실의 후예'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옥봉은 17세에 양반 집안에 출가 하였으나 1년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친정으로 돌아 왔다.
옥봉은 한양에서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조원(1544~1595)을 만나게 되고 그를 흠모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만나 소실로 맞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봉은 포기하지 않고 조원의 장인 이준민에게 부탁했고 이준민은 옥봉의 아름다운 자태와 빼어난 시문을 보고 사위를 설득했다. 사위 조원은 나이가 어리고 명망 있는 관리가 번거롭게 첩을 둘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장인 이준민은 웃으면서 '이런 일을 거절하는 것은 대장부다운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후 조웡은 옥봉에게 결혼한 여인이 시를 짓는 것은 남편의 얼굴을 깍아 내리는 일이라며 앞으로 시를 짓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1564년 소실로 받아 들였다.
조원은 1575년(32세) 사간원 정6품의 정언, 1576년 이조좌랑에 올랐고 1578년 자신의 친척을 관리로 임용했다고 탄핵 받아 10여년간 삼척부사, 성주목사 등 외직에 전전했다. 임진왜란 1년 전 1591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됐다.
조원의 조상묘가 파주에 있었고 묘지기가 소도둑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할 처지가 되자 묘지기 아내가 다급하게 조원을 찾아 갔다. 조원은 출타 중이어서 옥봉은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 한 수를 적어 묘지기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파주목사는 옥봉의 시를 보고 묘지기를 석방했다. 그러나 남편 조원은 사헌부 고위직의 아내가 파주목사에게 서찰을 보내 청탁한 것으로 보아 옥봉을 처가로 보냈다.
소박을 맞은 옥봉은 뚝섬 근처에서 방을 얻어 조원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노력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 났다. 임진왜란 중에 조원은 역모에 말려들어 추국을 받고 풀려 났으나 병을 얻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옥봉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뚝섬 근처의 허름한 초가에서 병들 어 죽었다는 설과 당나라 시인들을 동경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갔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사망설은 옥봉의 시신이 중국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설화 내용에 의하면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면서 조원이 아버지인것을 알게 됐다.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서 종이로 감긴 시신이 발견 됐는데 노끈을 풀고 종이를 보니 그 뒷면에 빽빽하게 시들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그 종이에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빼어난 시여서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명나라 대신은 서가에서 시집 한 권 「이옥봉시집」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옥봉의 명성 때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원의 셋째 아들인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없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한 적은 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이다.
임천조씨 후손들은 2017년 4월 사망 위치나 시기를 알 수 없는 옥봉을 기리고자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 주변 임천조씨 묘역 운강공 조원의 묘 옆에 묘비를 세웠다.
작품집
옥봉집
조선시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이 지은 시 32편을 후손 조정만이 간행한 시집이다.
「옥봉집」의 서두에는 “시문에 능한 시들이 많으나 흩어져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여기 권말에 붙여둔다.”고 부록한 뜻을 밝혔다. 말미에는 조정만(趙正萬)의 발문이 있다. 시집 속에는 오언절구 10편, 칠언절구 14편, 오언배율 4편, 그리고 칠언배율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월도중(寧越道中)」·「증운강(贈雲江)」·「칠석(七夕)」·「규정(閨情)」·「고별리(告別離)」 같은 시는 인구에 많이 회자되었다.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는 이웃에 소도둑으로 몰린 사람을 대신하여 지어준 시이다.
옥봉집 32편 중에서 11편은 『황명열조시집(皇明列朝詩集)』에 수록된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11편 중에서 「반죽원(斑竹怨)」과 「채련곡(採蓮曲)」은 이달(李達)의 시집에도 실려 있는 작품이어서 옥봉의 작이라고 하기에 의심스럽다. [1]
기타
옥봉의 시 11편이 명나라와 조선에서 펴낸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허난설헌의 시와 함께 실려 있다.
작품 소개
위인송원(爲人訟寃 )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 세수하며 대야를 거울로 삼고
梳頭水作油 (소두수작유) : 머리를 빗으며 물을 머릿기름으로 씁니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 제가 직녀가 아닌데
郎豈是牽牛 (낭기시견우) : 남편이 어찌 견우이리오
- 칠석에 일어난 사건으로 견우와 직녀를 빗대어 견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갔는가
몽혼(夢魂)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안부를 묻노니 요즘 어떠신지요?
月白紗窓妾恨多 (월백사창첩한다) 달 밝은 창가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속의 혼이 발자취를 남긴다면
門前石路已成沙(문전석로이성사) 님 계신 곳 문 앞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 남편 조원을 그리워하며 쓴시
규정(閨情)
有約來何晩(유약래하만) 매화꽃 피면 돌아오신다더니 어이 이리 늦으시나요
庭梅慾謝時(정매욕사시) 정원의 매화는 벌써 시들려 하는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문득 가지 위의 까치소리 듣고서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을 그려 봅니다.
- 여인의 그리운 마음
영월도중(寧越道中)
五月長干三日越 (오월장간삼일월) 오월 긴 산을 삼 일만에 넘어서니
哀歌唱斷魯陵雲( 애가창단노릉운) 노릉의 구름에 애처로운 노래 끊어진다
安身亦是王孫女 (안신역시왕손녀) 내 몸 또한 왕가의 자손이라
此地鵑聲不忍聞 (차지견성불인문) 이곳의 접동새의 울음소리는 차마 듣기 어려워라
- 단종이 묻혀있는 영월을 지나면서 읊은 시
이한(離恨)
平生離恨成身 평생이한성신병) 이별의 한이 평생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주불능료약불치) 술로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네
衾裏泣如下水 (금리읍여빙하수) 얼음 아래 흐르는 물처럼 이불 속에서 흘리는 눈물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밤낮을 흐르건만 그 누가 알리오.
평가
옥봉의 시 몽혼(夢魂)은 평안도 지역의 서도민요 명창들의 가사에 많이 애송됐다. 즐겨 애송된 내용은 '사람의 넋이 흔적을 남기며 다닐 수 있다면, 수천수만 번 님 계신 곳을 들락거려 그 돌길이 닳아서 모래가 되 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허 균은 "맑고 굳세어서 얼굴 단장이나 하는 아녀자의 투가 아니다"라고 했고, 신흠(申欽)은 "근래 여인의 작품으로는 옥봉 이씨가 제일이다. 고금에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는 아직 없었다."라고 격찬했다.
홍만종 은 "옥봉 이씨를 조선의 여류 시인이라 일컫는다."라고 적었다. 또한 조원의 친구인 윤국형은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부채로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라고 했다.[2]
관련 정보
링크 모음
주변 명소
더보기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