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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음령 너머 용미3리는 세류동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잔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역참인 세류점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 때 호병들이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하여 '호주골'이라고도 불렸고, 호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죽골'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혜음령 너머 용미3리는 세류동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잔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역참인 세류점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 때 호병들이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하여 '호주골'이라고도 불렸고, 호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죽골'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 쌍불현(雙佛峴) ===
 
=== 쌍불현(雙佛峴) ===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국보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곳이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m, 얼굴 크기는 2.4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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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국보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곳이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m, 얼굴 크기는 2.4m 정도이다.
 
고려 13대 왕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선종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13대 왕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선종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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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수원(焚修院) ===
 
=== 분수원(焚修院) ===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위치한 원 시설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장소였다. 분수원마을은 현재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위치한 원 시설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장소였다. 분수원마을은 현재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