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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변천==
 
==지명 변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때 술이홀이라고 불리던 현 파주읍 지역을 중국신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현으로 바꾸어 '술이홀현'이 됐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봉성현으로 고치고 교하군 소속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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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때 술이홀이라고 불리던 현 파주읍 지역을 중국식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현으로 바꾸어 '술이홀현'이 됐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봉성현으로 고치고 교하군 소속으로 두었다.
    
봉성이라는 지명은 술이홀의 한자어로 볼 수 있다. ‘술이’가 ‘수리’라는 뜻으로 ‘꼭대기〔頂〕’의 의미를 가지고 ‘홀’은 ‘들’ 또는 ‘벌’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들판의 성’이라는 뜻과 같은 의미가 된다. 봉성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들’이라는 뜻이므로 넓은 분지인 지형과 관련이 있다.<ref>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봉성이라는 지명은 술이홀의 한자어로 볼 수 있다. ‘술이’가 ‘수리’라는 뜻으로 ‘꼭대기〔頂〕’의 의미를 가지고 ‘홀’은 ‘들’ 또는 ‘벌’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들판의 성’이라는 뜻과 같은 의미가 된다. 봉성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들’이라는 뜻이므로 넓은 분지인 지형과 관련이 있다.<ref>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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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알려진 파주목 관아지의 부지규모는 객사였던 국군 제501 기무부대와 구 파주읍사무소가 72천여㎡이고 <ref>파주목 관아터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ref>  동헌이었던 파주초교 부지가 21천여㎡로 전체 93천여㎡(28천여평,금촌택지 C3블록의 2.2배)이다.  이외에도 연무정,사당, 무기고 등을 포함하면 10만여㎡ 이상의 규모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파주목 관아지의 부지규모는 객사였던 국군 제501 기무부대와 구 파주읍사무소가 72천여㎡이고 <ref>파주목 관아터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ref>  동헌이었던 파주초교 부지가 21천여㎡로 전체 93천여㎡(28천여평,금촌택지 C3블록의 2.2배)이다.  이외에도 연무정,사당, 무기고 등을 포함하면 10만여㎡ 이상의 규모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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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건물 중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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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목 관아는 초기 설치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기록에 남은 주요 건립 시기는 다음과 같다.<ref>파주연구 15호, 파주문화원 부설 향토연구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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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숙종 14년): 당시 파주목사로 부임한 박태보(朴泰輔)가 청사가 너무 낡고 허물어진 지 20여 년이 지나 창고에서 업무를 보는 실정임을 안타깝게 여겨, 대대적으로 100여 칸 규모로 신축하였다. 이때 동헌의 이름을 '풍락헌(豊樂軒)'이라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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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 (영조 42년): 목사 이창운(李昌運)이 퇴락한 풍락헌과 안회당 등을 보수하고 담장과 행랑을 증축하여 '어목헌(禦牧軒)'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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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1871년경: 19세기 읍지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아에는 동헌 1011칸, 내아 13칸, 객사 1718칸 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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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청사|파주시 청사의 역사]]
 
*[[파주시 청사|파주시 청사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