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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교하·운정_지명_갈등|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렀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를 상소할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 일부가 교하군의 관할 구역이다. | [[운정/교하·운정_지명_갈등|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렀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를 상소할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 일부가 교하군의 관할 구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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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한강과 임진강이 위치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 이와 함께 한강과 임진강이 위치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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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이 심해진 시기이다. |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이 심해진 시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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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3년간 100여 차례 상소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ref>1617년 음력 4월20일 1번기사 참조</ref> | 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3년간 100여 차례 상소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ref>1617년 음력 4월20일 1번기사 참조</ref> | ||
− | ==교하 천도론의 | + | ==여론 여담== |
+ | ===교하 천도론의 정치성=== | ||
조원석(서경대학교 경영문화대학원 )은 논문에서 광해군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 정씨 왕조설에 대한 소문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 방안으로 천도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 조원석(서경대학교 경영문화대학원 )은 논문에서 광해군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 정씨 왕조설에 대한 소문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 방안으로 천도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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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5일 (목) 12:50 기준 최신판
1612년 11월 광해군 4년, 당시 역술관인 이의신이 임진왜란과 역적의 변이 잇달아 일어 나는 것은 한양의 지기가 쇠해진 것이라며 도읍을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왕은 천도를 동의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지역 여건
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렀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를 상소할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 일부가 교하군의 관할 구역이다.
교하군의 행정을 관할하는 읍치는 현재 파주 장릉이 있는 탄현면 갈현리 주변에 있었다.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으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1731년 갈현리로 이전됐다. 이때 교하군 읍치는 금촌으로 옮겨졌다.
역술관 이의신이 교하 천도를 주장한 위치가 교하리 또는 갈현리 주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교하천도를 논의할 때 교하군 읍치는 갈현리에 있었다. 이곳에 대한 풍수는 장릉을 이전할 때 왕에게 보고됐던 기록이 남아 있어 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록에는 한북정맥에서 분맥한 오두지맥의 지기가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고 있는 월롱산에 모여 갈현리로 내려와 강한 기를 갖고 있는 용맥이라 했다.
이와 함께 한강과 임진강이 위치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배경과 과정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이 심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의신은 한양의 지기가 다해 새로운 곳으로 도읍을 이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지기가 다한 증거로 임진왜란이발발하고 여러 차례의 모반 사건과 당쟁의 격화, 서울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새로운 길지로는 교하가 적지이며 군사적으로도 방어에 유용하고 중국 대륙과 해상교역 가능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왕은 이의신의 상소에 대하여 예조 판서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1612.11.15(음)일 검토 내용을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이의신 교하 천도 주장은 경전에 나타나지도 않은 말을 주어 모은 괴이한 글이라고 했다.
광해군은 보고를 한 예조 판서에게 옛부터 새로운 도성을 세우더라도 반드시 이전한 것은 아니다. 왕이 근거 없는 말로 천도한다는 지적은 삼가하라고 지시했다. [1]
교하천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왕은 1613.1월 비변사에 비밀 전교를 통해 교하는 강화를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특이한 곳으로 성을 쌓고 가끔 순행하려고 하니 대신과 지관은 현장의 형세를 그려 오라고 지시했다.
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3년간 100여 차례 상소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2]
여론 여담
교하 천도론의 정치성
조원석(서경대학교 경영문화대학원 )은 논문에서 광해군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 정씨 왕조설에 대한 소문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 방안으로 천도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의신이 상소를 올리기 전부터 '일한이하삼강사해(一漢二河三江四海)'라는 유언비어가 유행했다. 이 내용은 도읍이 이전한다는 내용으로 처음은 한양이고, 두 번째는 교하를 말하며, 세 번째는 강화, 네 번째는 해풍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유언비어는 교하 천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된 것으로 추정하면서 광해군이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논문에서 저자는 당시 교하군 지역에서도 천도 지역을 교하리보다 갈현리를 천도 위치로 보았다. 갈현리는 개명지맥(일명 오두지맥) 일부로 고양시 개명산에서 이어 온 기세가 광탄 됫박고개와 월롱산을 지나고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길지라고 보았다. 교하리는 수세가 좋으나 감악지맥의 웅고한 산들이 이 지역을 압도하는 형국이라 관청이 들어설 자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또한 저자는 풍수적으로 산세, 수세, 국세로 볼때 교하가 수도의 권부가 자리하기에는 산세가 작을 뿐만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이어서 대홍수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다만, 파주 지역중 감악지맥의 웅고한 산을 후룡으로 하여 배산임수가 갖추어진 광탄면 일대와 조리읍 일대가 적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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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조원석, 풍수지리 이론로으로 분석한 교하지역의 수도입지 적정성 연구,2016.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