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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말경 미1군단 사령관은 2건설공병단 소속 제84건설공병대에게 홍수시기를 감안해 1953년 7월까지 교량을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임진강에 부교 등의 작전교량을 설치하던 부대로 ‘임진강의 정복자’(The Conquerors of theImjin)라고 불렸다. | 1952년 10월말경 미1군단 사령관은 2건설공병단 소속 제84건설공병대에게 홍수시기를 감안해 1953년 7월까지 교량을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임진강에 부교 등의 작전교량을 설치하던 부대로 ‘임진강의 정복자’(The Conquerors of theImjin)라고 불렸다. | ||
− | 84건설공병대장은 콘크리트 교각이 기반암에 고정되어여만 임진강의 극심한 홍수와 결빙을 견디고 일 년 내내 활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암반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1952.11.1일 시험용 파일을 박고 수집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제2건설공병대에서 1959.11.9일에 교량 설계도가 도착했지만 지끔까지 공병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 교량은 파평면 장파리에서 진동면 용상리를 연결하고 연장 328m, 교량폭 | + | 84건설공병대장은 콘크리트 교각이 기반암에 고정되어여만 임진강의 극심한 홍수와 결빙을 견디고 일 년 내내 활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암반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1952.11.1일 시험용 파일을 박고 수집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제2건설공병대에서 1959.11.9일에 교량 설계도가 도착했지만 지끔까지 공병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 교량은 파평면 장파리에서 진동면 용상리를 연결하고 연장 328m, 교량폭 7m이다. 교각 높이는 건물 10층 정도인 45m이고 8개의 교각을 설치하는 공사였다. |
이 공사는 최소한 1년 이상 소요되는 규모이지만 이 교량을 1953년 7월말까지 완공하는 것이 작전명령이다. 교량 완공목표인 7월까지는 동절기를 제외하고 5개월 정도의 기간 밖에 남지 않았다. 공병대장은 한국의 겨울이 끝나는 3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공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11월부터 12월말까지 장비와 물자를 조립하고, 정비소, 목수 작업장, 물자 보관 건물과 야적장을 만들었다. | 이 공사는 최소한 1년 이상 소요되는 규모이지만 이 교량을 1953년 7월말까지 완공하는 것이 작전명령이다. 교량 완공목표인 7월까지는 동절기를 제외하고 5개월 정도의 기간 밖에 남지 않았다. 공병대장은 한국의 겨울이 끝나는 3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공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11월부터 12월말까지 장비와 물자를 조립하고, 정비소, 목수 작업장, 물자 보관 건물과 야적장을 만들었다. |
2024년 1월 28일 (일) 20:41 기준 최신판
리비교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 공병대가 작전교량으로 건설했다.
개요
1950.6.25일 전쟁이 발발하고 1년후에는 38도선 부근으로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됐다.
파평면 장파리 임진강에 설치했던 리비교 다리(당시 X-ray bridge )가 1952년7월에 홍수로 떠 내려가자 미 제 1군단 사령관은 복구하기보다는 실용적인 교량을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리비교는 장마전인 1953.7월말까지 공사를 완공해야하는 작전명령으로 1953.7.4일 준공하고 1953.7.15~7.16일 발생한 첫 홍수에 리비교는 큰 파손 없이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냈다.
당시 이용된 리비교의 공법은 미국 모든 주의 고속도로 시스템에 도입할 만큼 뛰어난 기술력과 완성도를 자랑했다.
공사 준비
미8군공병대가 임진강 홍수를 견딜 수 있는 교량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한 광범위한 연구를 실시했고, 제2건설공병대는 미8군에서 제공한 기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체 연구를 통해 적합한 다리 설계를 진행했다. 1952년 10월말경 미1군단 사령관은 2건설공병단 소속 제84건설공병대에게 홍수시기를 감안해 1953년 7월까지 교량을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임진강에 부교 등의 작전교량을 설치하던 부대로 ‘임진강의 정복자’(The Conquerors of theImjin)라고 불렸다.
84건설공병대장은 콘크리트 교각이 기반암에 고정되어여만 임진강의 극심한 홍수와 결빙을 견디고 일 년 내내 활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암반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1952.11.1일 시험용 파일을 박고 수집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제2건설공병대에서 1959.11.9일에 교량 설계도가 도착했지만 지끔까지 공병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 교량은 파평면 장파리에서 진동면 용상리를 연결하고 연장 328m, 교량폭 7m이다. 교각 높이는 건물 10층 정도인 45m이고 8개의 교각을 설치하는 공사였다.
이 공사는 최소한 1년 이상 소요되는 규모이지만 이 교량을 1953년 7월말까지 완공하는 것이 작전명령이다. 교량 완공목표인 7월까지는 동절기를 제외하고 5개월 정도의 기간 밖에 남지 않았다. 공병대장은 한국의 겨울이 끝나는 3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공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11월부터 12월말까지 장비와 물자를 조립하고, 정비소, 목수 작업장, 물자 보관 건물과 야적장을 만들었다.
동절기가 되기전까지 콘크리트 공사에 가장 필요한 모래와 자갈을 준비하기 위해 현장 부근에 골재를 성분 조사했다. 이 곳의 골재는 토사 함량이 과도해서 공사에 사용할 수 없었다. 임진강 상류를 구간별로 조사하는 중에 적성면 가월리 틸교 공사장 부근에서 최적의 골재를 발견했다. 장파리 현장과는 15km 정도이지만 바로 골재 채취 작업에 들어 갔고 골재를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공병대 대부분의 병력은 새로운 방식의 교량 설계에 대한 공사 경험이 없었다. 공사 업무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정을 세분화하여 작업대별로 교육을 실시했다. 공병대 소속의 카투샤 155명에게도 공사 투입을 준비시켰다.
병력과 별도로 용접공 20명, 잠수부 4명, 리벳공 2명, 목수 등 30여명을 한국 민간인으로 구성했다. 한국인 용접공은 상향 용접(overhead welding)에 대한 기술 부족으로 추가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공사 추진
공사 초기
그동안 준비를 마치고 실제 공사는 1952.12.26일 6번 교각용 첫번째 파일을 운반하면서 시작됐다. 파일 운반은 6번 교각부터 북쪽으로 7,8번 교각 순으로 진행됐고 동쪽은 1번 교각부터 2,3,4,5번 교각순으로 운반됐다.
리비교 공사중에 가장 어려운 단계는 교각을 세우기 위한 기반 공사이다. 동절기에 교각을 묻기 위해 코퍼댐(coffer-dam)을 굴착하고 콘크리트를 채워 넣는 일이다. 교각의 위치에 따라 암반과 토사의 차이가 있어 8개의 교각이 서로 다른 문제와 해결책이 필요했다.
교각 기반공사는 암반을 굴착하여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를 채워 넣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연결 파일들은 이음 부분이 오차 범위 이상 틈이 갈라져 위아래 부분에 누수가 발생했다. 갈라진 틈에 방수재료로 끼워 넣었지만 계속 누수가 됐고 연결 부위에 삽입할 수 있는 목재 쐐기를 새롭게 만들어 누수를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교각 기초공사인 코퍼댐 공사는 기반암 표면이 불규칙하고 불량 파일로 인하여 교각과 암석 연결 부분을 완전하게 밀착 시키기 어려웠다. 코퍼댐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 교각과 암석 연결부분에 붕괴가 발생했다. 이 사고 이후 각각의 코퍼댐에 대하여 갈라진 틈을 세 번 이상 다시 메웠을 뿐만 아니라 교각 파일을 뽑아 내거나 암반을 다시 뚫고 파일을 재설치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코퍼댐의 누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코퍼댐을 설치하기 위해서 고인물을 계속적으로 퍼내는 양수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절기 공사이어서 작동 중에도 배출구와 연결부가 얼어 버려 공사를 중지해야만 했다. 연결부가 막히게 되면 펌프 관로 펌프 내부에도 물이 얼어 버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가열할 수 있는 온풍기를 설치해 펌프를 정상적으로 작동시켰다.
공병대 작전과의 프로젝트 담당자인 소령 월리엄 카터(William C.Carter)는 자주 발생되는 코퍼댐의 붕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하상 바닥을 잠수부를 이용하여 조사했다. 카터는 강바닥에 있는 암반 위에 진흙, 모래, 자갈 등이 장기간 퇴적하여 연약한 표층암으로 형성됐고 여기에 고인물을 양수하기 시작하면 압력이 감소하면서 붕괴 현상이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혹한과 전쟁
프로젝트가 시작된 1952년 11월부터 1953년 4월말까지는 극심한 추위와 진눈깨비 그리고 폭설 속에서 작업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날씨로 인해 밤이든 낮이든 작업이 중단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53년3. 20일에 갑작스런 홍수와 봄철 만조로 제방길이 침식되었고 그 후 5월 13일에는 완전히 침수되기도 했다. 물과 제방길의 즉각적인 보수가 필요했음에도 인력과 장비의 대피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동절기에 사용하는 모든 기계장비는 특수 난방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시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주요 차량 및 장비의 모터를 하루 24시간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공압호스(pneumatic hoses)도 물이 연결되는 부위가 동결되면 호스가 막혀버렸다. 모든 연결 부분에 일정한 온열을 지속적으로 가해 주어야 문제가 해결됐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의 용접과 콘크리트를 섞고, 타설, 경화하는 작업의 총 책임자였던 카터 소령과 A중대의 중위 도널드 매켄지(Donald W. Mckenzie)에게는 교량을 목표일까지 완공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목표일 완공을 위해 우선 물과, 모래, 시멘트를 섞어 콘크리트를 만드는 과정 중에 동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골재를 적정 온도로 올리고 37도에서 180도까지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샤워기 24대로 물을 데웠고 시간당 80톤에서 180톤을 처리할 수 있는 골재 드라이어(aggregate dryer)를 이용하여 콘크리트를 만들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경화될 때까지 일정한 상온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 열을 잃고 동결되어 버린다. 코퍼댐의 동결을 막기 위해 경화 캐빈이라는 독특한 모양의 덮개를 만들어 보온을 시켰고 공사중 발판으로 사용하게 했다. 캐빈 내부의 온도는 허먼 넬슨(Herman Nelsom)의 온풍기로 60도를 유지해 콘크리트의 양생이 적정한 상태로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1953년 2월 9일 물로 가득 차 있던 여섯 번째 코퍼댐(coffer-dam)에 첫 번째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은 콘크리트 버킷(concrete bucket)과 크레인으로 진행됐다. 이 작업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콘크리트 혼합물이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했다. 호퍼(Hipper)가 부착된 16인치 암코말뚝(Armco pile)을 이용하여 콘크리트를 코퍼댐(coffer-dam) 아래로 내려 보냈다. 암코 말뚝 하단은 혼합물이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부어져 있는 콘크리트 표면보다 30cm 정도 더 아래까지 들어가게 했다. 여섯번째 교각의 나머지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채웠다.
콘크리트 분리 현상을 방지하도록 새로운 공법을 이용하여 콘크리트를 타설했지만 콘크리트 품질에 대한 계속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작업을 중단하고 콘크리트 샘플을 채집하여 정밀 분석을 의뢰했다. 정밀분석 결과 최하단 1미터 높이부터는 콘크리트가 불량으로 판정됐고 1953년 3월 4일 공사중이었던 교각을 폭파했다. 3월16일부터는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하고 어느 정도 양생된 후 분석실험하여 양호한 결과을 얻었다.
8번째 코퍼댐(coffer-dam) 굴착은 1953년 2월 13일 완료되었으며 콘크리트 버킷(concrete bucket)과 크레인으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 진행됐다. 동절기에 시작된 다른 교각과는 달리 완전히 건조된 상태에서 콘크리트 작업이 된 유일한 교각이다.
다른 교각들과 마찬가지로 누수와 붕괴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버켓으로 3-4번 정도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일정 기간 양생 시킨 후에 지반암까지 콘크리트 구멍을 뚫어 강도를 시험하고 콘크리트를 마저 타설했다.
1953년 늦은 2월 되어서 펌프기계가 현장에 도착했고 콘크리트를 먼거리에서도 상당한 높이까지 펌핑할 수 있었다. 펌프기계가 필요한 지점까지 콘크리트를 전달해주었기에 콘크리트 주입 작업에 드는 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각 교각마다 5개의 주입 리프트(pours of lifts)가 세웠고 편의상 알파벳 순으로 이름을 붙였다. “A” 주입구는 수문에서 평균 240입방야드(1입방야드는 0.765㎥)의 콘크리트 케이슨 야드(3피트, 0.9144미터)이고, “B” 주입구는 16.5피트의 낮은 두개의 수직 기둥, 그리고 하단은 “H”자형의 교각 이었다. “C” 주입구는 수평 중간 보강재였고, “D” 주입은 보강대 위의 두개의 상부 수직기둥이었다.
교량의 구조물과 자재들은 최대한 강변 작업장에서 준비하고 조립된 후 교량에 설치했다. 철근 (reinforcing steel)은 중앙 작업장에서 설계도 크기로 매트에서 조립된 후 필요할 때마다 교각 쪽으로 이동시켰다.
모든 부품은 C중대의 지휘관인 중위 해리 니시모토(Harry R.Nishikimoto)의 감독 아래 목공소에서 만들어졌으며, 최소한으로 분해하여 재사용 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었다. 경계석은 상판을 고정하는 것과 동일한 버팀대(bracket)를 사용하도록 설계되었고 상부구조 74m의 갑판(deck)은 운반이 용이하도록 조정했다.
경계석 배치도 동일한 부품을 이용하여 동일한 형태로 배치되었다. 난간 기둥(post) 마찬가지로 동일한 형태로 계속해서 총 66개가 배치 되었다. 시험 설치를 위해서 실물 크기의 갑판 부품들을 중앙 작업장에서 만들었다.
철골 제작과 배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상부구조물에 사용되는 거더(대들보)는 48인치 I자형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제품이었는데 필요한 길이의 스팬(span)을 만들기 위해서는 접합판과 함께 리벳으로 고정되게 했다.
구조물 제작은 2월초에 시작되어 6월 5일까지 이어졌으며, 중위 커티스엠드만(Curtis W. Emdman)과 하사관 해리 쿨리(Harry Cooley)가 전체 철강 설치 공사를 담당했다.
리벳 작업이 시작되던 날에 대대에서 유일한 민간인 리벳공이 갑자기 그만 두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급하게 한국인 두 명을 구해 일주일간 훈련시켜서 리벳 작업을 맡겼다. 육군 보급 물자를 통해 제공된 리벳 해머는 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좀더 무거운 해머를 제작하기 위해 한국 계약 업체에 주문 제작했다.
원활한 공사
4월 초 서쪽 교대(abutment)에서 7번째 교각까지 이어진 I형 대들보가 완성되었다. 한쌍의 대들보를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대들보를 적당한 거리로 띄어 놓고, 그 두 대들보 사이에 6x6인치 각도(angle)와 15인치 홈쇠(channel iron)로 보강했다.
이 대들보 쌍은 교각에 도달했을 때 대들보의 하향 편향을 보완하기 위해 위쪽으로 30피트 진수 모세(launching mose)를 전방에 고정하였고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들보(girder)의 끝에 평행추(counterweight)를 추가했다.
대들보(girder) 교대를 수평으로 가로질러 상판의 높이 정도로 놓아야 했기에, 무거운 목재로 지지하는 교각 두부(pier cap)에 끌어 내려질 때까지 대들보를 받치고 지지했다.
3개의 상향 대들보는 파형강(corrugated steel)으로 이미 하위 상판에 자리를 잡았다. 대들보는 1, 2, 3, 4, 5, 동쪽 스팬 교각에 걸쳐 있으며 동쪽 강변에서 제작되어 동쪽 교대를 가로 질러 놓았다.
이 대들보(girder)가 놓여졌을 때 길이는 185m였고, 그것들은 각자의 위치로 옮기는 데는 엄청난 공학적 기술이 필요했다. LT Badman과 WO Cooley는 대들보가 놓여지기 전에, 하위 갑판의 모든 대들보(girder)를 용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고, 그 방법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류의 대들보(가로막(diaphragming)과 연결된 5개의 I자형 대들보 2개)를 상류의 대들보(다른 세 개의빔) 보다 5인치 더 높게 배치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다른 갑판과의 충돌을 예방했고 상류의 대들보는 하류의 대들보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그런 다음 두 대들보를 제자리에 놓게 되면 갑판이 계획대로 잘 맞았다.
7,6,5번째 교각의 스팬은 서쪽 강변에서 조립되었으며 7,8번째 교각과 서교대 위에 완벽히 설치되었다. 체인으로 들어올리는 골격은 다른 스팬의 마룻장에 고정했다. 7,8, 교각과 서쪽 교대에 상응하는 대들보를 내리는데는 8일이 필요했고 그동안 하류의 대들보 위치를 22시간 동안 낮추어 놓았다.
대들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구조화 된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특히 마지막 대들보(girder)가 최종적으로 제 자리를 잡았을 때, 완공 목표일이 가까워 지면서 콘크리트 데킹(decking) 작업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강화 철매트를 깔았고 콘크리트 데크는 펌프크리트(pumpgrete)관 끝에 활송 장치(chute)를 분리하여 설치했다. 곧은 부분을 사용하여 원하는 평평한 면을 확보하도록 마대를 끌어 표면을 고르게 마감하면 과도한 수분도 제거했다.
6월 14일 콘크리트를 부었으며, 물에 적신 삼배로 7일간 경화 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교각을 매끄럽게 마감하고 난간에 도색을 했다. 공사중에 설치한 비계와 보행자용 통로를 철거하고, 진입로 정비 작업을 한동안 계속 했다.
공사 완공
원래의 교량 완공 목표일은 1953년 7월 1일이었다. 사전 계획과 많은 노력, 그리고 일을 끝내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력 덕분에 제 시간 안에 완공할 수 있었다.
11월부터 3월까지 10시간씩 2교대로 일을 하였으며, 3월 하순부터는 11시간씩 2교대로, 그리고 6월 1일 이후부터 교량 완공시까지는 12시간씩 2교대로 일하였다. . 얼어붙은 날씨와 강한 바람, 홍수, 높은 조수 그리고 심지어 적군의 포화까지 많은 것들이 공사를 더디게 만들었다. 공사 작업시에는 잠수 작업, 암반 굴착, 콘크리트 주입 작업이 가장 큰 지연의 원인이 됐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카터 소령은 “완성한 것 이외는 제 시간안에 끝낸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리비교 건설은 전체 공정에서 계획된 일정안에 완료한 공정은 하나도 없었다.
교량을 건설하는 동안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9년 1월 1일 카투사 김호덕 상병은 7번 교각에서 폭약이 폭발해 사망했다. 제임스 오그라디(James E. O’Grady)일병은 1953년 4월 16일 배가 뒤집혀 익사할 위기에 있는 한국 민간인 노동자를 구하다가 익사했다.
84건설공병대 지휘관은 이 두 명의 이름을 다리 이름으로 제안하였으나, 미8군 사령관부에서는 1950년 7월 20일 한국 대전지구 전투 영웅으로 용감한 행동과 영웅적 자기희생으로 사후에 명예훈장을 받은 3전투공병대대 병장 조지 리비(George D. Libby)의 이름을 따서 짓도록 지시했다.
리비교는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고 곧 바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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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파주 DMZ 및 접경지역 국외자료 수집과 콘텐츠 활용 종합계획사업 보고서 (2020.1월)
- BRI’DGING THE IMJIN CONSTRUCTION OF LIBBY AND TEAL BRIDGES DURING THE KOREAN WAR (OCTOBERl952-JULY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