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조씨 군자감정공파종중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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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 부근에 위치한 임천조씨 군자감정공파종중의 묘역이다.

제실과 1묘역

개요

임천조씨(林川趙氏)는 조선시대 파주 혜음리에 정착하여 3대에 걸쳐 장원급제라는 전무 후무한 학문적 전통을 이룬 명문가이다. 묘역에는 12세~23세(1547~1900)까지 12대에 걸친 선조들의 묘와 석물이 있다. 이중 14세 조원,15세 조희일,16세 조석형은 3대에 걸쳐 장원급제를 하였으며 조희일과 조석형은 묘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특히 14세 조원은 이율곡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조정에서 정사를 논한 내용들이 조선 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정착 배경

임천조씨 가문의 선조들은 원래 고양의 선영에 매장되었으나, 조희일이 사후 파주 혜음리로 이장되면서 이곳이 가문의 종중 묘역이 되었다. 이는 조희일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으로, 광탄 용미리의 지리적 조건이 가문의 번영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는 조선 사대부 가문들이 특정 지역에 세거지나 묘역을 정하고 문중 공동체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임천조씨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파주 혜음리를 중심으로 가문의 지역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주요 인물

조 원

조원(趙瑗,14세,1544~1595)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할아버지는 조익(趙翊)이고, 아버지는 조응공(趙應恭)이며,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다.판서 이준민(李俊民)의 사위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이율곡과는 동방(同榜)이다.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 정언(正言)이 되어 이 해 당쟁이 시작되자, 조원에 대한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여 당파의 수뇌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였다.이듬해 이조 좌랑이 되고, 1583년 삼척부 사로 나갔다가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 자손의 교육도 단엄(端嚴)하였다.

종로구 효자동의 지명은 조원 아들, 희정, 희철의 효심으로 지어진 지명이다..당시 조원의 집터인 운강대(雲江臺)가 현재 경복고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조선중기의 여류 시인이옥봉은 조원의 소실이다 .저서로는 『독서강의 (讀書講疑)』가 있으며, 유고로는 『가림세고(嘉林世稿)』가 있다.

조희일

조희일(趙希逸, 15세, 1575-1638)은 본관이 임천이며,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이다. 승문원 판교 조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좌랑 조응공, 아버지는 승지 조원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혀 선조가 그 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이듬해 160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조희일은 승문원저작, 승정원주서를 거쳐 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왔을 때 예조좌랑으로 빈사 유근을 따라 영접하여 그의 시문이 크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1613년 허균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산(지금의 평안북도 초산)에 안치되었다가 1619년 방면되었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교리, 부응교에 제수되어 경연관을 겸했고,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다.

조석형

조석형( 趙錫馨, 16세, 1598-1656)은 조희일의 장남으로,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 이다. 광해군 때 아버지가 유배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따라다니며 어려움과 험난함을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풍에 걸려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부친을 모시는 효성을 다했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할아버지 조원, 아버지 조희일에 이어 3대가 모두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문적 성취였다.

일찍이 세자익위사의 세마, 시직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에도 시직, 부수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와 진체에 뛰어났으며, 스스로 당호를 '근수헌'이라 하였다. 조석형은 가정에서의 행실이 순일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7세에 선비 정부인의 초상을 만나서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함을 어른처럼 하였으며, 계비 심부인을 더욱 정성을 다해 모셔 심부인이 그 효성에 감탄할 정도였다.

아버지 조희일의 상을 당해서는 시묘를 살면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며, 손수 유집을 붓으로 쓰다가 손이 트고 굳은살이 박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경망

조경망(趙景望, 1629~1694),17세,1629~1694) 자는 운로(雲老), 호는 기와(奇窩). 아버지는 조석형(趙錫馨)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사마시에 합격한 뒤 남항(南行)으로 환로에 들어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노론 일파가 몰락하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파주에 은거하였으며, 얼마 뒤 호서(湖西)의 덕산(德山)으로 옮겨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에 정통하였고, 전서·예서·해서 등 서도의 각 서체에 두루 정묘하여 당시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김창협이 지은 농암집에 조경 망이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시험장에서 1등으로 발표되었으나 관리들의 농간으로 4위로 밀려난 사실이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경창

조경창(趙景昌, 17세, 1634-1694)은 조석형의 삼남으로, 자는 문로(文老)이다. 숭정 갑술년(1634) 7월 16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이기려 하지 않았으나,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오래된 친척이라도 엄하게 대했다.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후에 동몽교관, 선공감역, 의금부도사, 영평현령을 역임했다. 어머니 김부인이 60세가 넘어 두창에 걸려 위험한 상황에서 밤낮으로 간병하며 직접 가려움을 긁어주고 목욕시켜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23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7년 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예법을 지나치게 지켜 평생 병이 될 정도였다. 상을 마친 후 호서의 덕산에 우거하며 임원계간의 승경을 즐겼다. 높은 대를 쌓고 정사를 지어 경치를 감상하며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했다. 향리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인품을 우러러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찾아와 자문을 구했다. 도신이 그의 행의를 여러 번 조정에 추천하여 1681년 여름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당시 나이가 이미 많았지만 큰형 조경망과 떨어져 살기 어려워 마지못해 벼슬에 나갔다. 이후 선공감역, 의금부도사를 거쳐 영평현령으로 3년간 재직한 후 귀향했다. 큰형 조경망과 담을 사이에 두고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며 시와 글을 논하는 것을 만년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1694년 봄 병에 걸려 3월 22일 61세로 별세했다. [[출처 : 조경창 묘 묘표]]

묘역 조성

구역도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임천조씨 묘역은 78번 지방도를 경계로 남북에 걸쳐 조성된 대규모 종중 묘역이다. 묘역은 크게 3개 구역로 나뉘어 있다. 78번 지방도 북쪽에는 제1묘역과 제3묘역이, 남쪽에는 제2묘역이 자리잡고 있으며, 제1묘역과 제2묘역 사이에는 고려시대 창설된 혜음원지가 위치하고 있다.

제1묘역

이옥봉 묘

1묘역 A구역에는 가문의 뿌리가 되는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다. 12세 조익(14741547)은 조선 초기 가문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그의 묘는 임천조씨의 조선 정착을 상징한다. 조익의 장남인 13세 조응겸은 가문 계승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7세 조경망(16291694)은 장원급제 후 4위에 입학한 문신으로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갔다.

B구역은 더욱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13세부터 27세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안장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매장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13세 조익의 아들들인 조응겸,조응침, 조응공, 조응순의 묘는 가문 분파의 시작점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도 14세 조원(1544~1595)의 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3대 연속 장원급제 전통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또한 조원의 소실로 조선시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진 이옥봉의 묘단이 이다.

제2묘역

조희일 신도비

78번 지방도 남쪽에 위치한 제2묘역은 현재 문화재 지정 신청의 핵심 구역이다. 이곳에는 임천조씨 가문의 가장 큰 자랑인 3대 연속 장원급제를 이룬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다.

15세 조희일(1575~1638)은 죽음(竹陰)이라는 호로 불리며 예조참판까지 역임한 대표적인 문신이다. 1601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그는 아버지 조원에 이어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갔다. 조희일의 묘는 해주정씨와 청송심씨와의 쌍분묘로 조성되어 당시 혼인 문화의 특징도 보여준다.

16세 조석형(1598~1656)은 조희일의 장남으로 근수헌(近水軒)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62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연속 장원급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완성했다.

이 구역의 백미는 부자 신도비이다. 조희일과 조석형의 신도비에는 송시열, 김수증, 김수항, 이의현, 민진원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참여했다.

제3묘역

78번 지방도 북쪽 끝에 위치한 제3묘역은 17세 조경창(1634~1694)이 대표 인물로 그는 인원왕후의 외조부이자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이 사위이다, 임천조씨 가문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핵심 인물이다. 조경창의 묘는 왕실 외척의 위상에 걸맞게 규모가 웅장하며, 김주신이 직접 찬한 묘표가 있다..

22세 조기복(1773~1839)의 묘에 있는 그의 묘표는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것으로, 19세기 금석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23세 조면호와 24세 조장호의 묘역 구성은 전통적인 조선시대 양식을 따르면서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 신청

임천조씨 묘역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순과 계층에 따른 체계적인 배치이다. 제1묘역의 A지역과 B지역 구분, 제2묘역의 집중적 배치, 제3묘역의 특별한 지위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매장 문화가 어떻게 위계질서를 반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특히 각 묘역에서 발견되는 석물들의 규모와 정교함의 차이는 당시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조희일과 조석형의 신도비처럼 당대 최고 문인들이 참여한 경우와 일반적인 묘표의 차이는 그 가문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문화적 역량을 짐작하게 한다. 2025. 8월 임천조씨 종중에서는 제2묘역을 중심으로 문화재 지정 신청이 진행되고 있으며 전체 묘역에 대한 종합적인 보존 방안 마련도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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