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11월 광해군 4년, 당시 역술관인 이의신이 임진왜란과 역적의 변이 잇달아 일어 나는 것은 한양의 지기가 쇠해진 것이라며 도읍을 교하로 천도하는 것을 상소했다. 왕은 천도를 동의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교하 여건
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렸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 하자는 상소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교하군의 행정을 관할하는 읍치는 현재 파주 장릉이 있는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다.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으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1731년 갈현리로 이전됐다. 이곳에 있던 교하군 읍치는 금촌으로 옮기게 됐다.
역술관 이의신이 교하 천도를 주장한 위치가 교하리 또는 갈현리 주변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교하 천도 상소를 올린 시기에는 교하군 읍치가 갈현리에 있었다. 이곳에 대한 풍수는 장릉을 이전할 때 왕에게 보고됐던 기록에 남아 있어 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록에는 한북정맥에서 분맥한 오두지맥이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고 있는 월롱산에 산맥의 지기가 모여 갈현리로 내려와 이 곳은 강한 기를 갖고 있는 용맥이라 했다.
이와 함께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이 있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천도론 배경과 과정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이 심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의신은 한양의 지기가 다해 새로운 곳으로 도읍을 이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임진왜란 발발과 여러 차례의 모반사건 발생, 당쟁의 격화, 서울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새로운 길지로는 교하가 적지이며 군사적으로도 방어에 유용하고 중국 대륙과 해상교역 가능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왕은 이의신의 상소에 대하여 예조 판서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1612.11.15(음)일 검토 내용을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이의신 교하 천도 주장은 경전에 나타나지도 않은 말을 주어 모은 괴이한 말이라고 했다.
광해군은 예조판서에게 보고를 받고 새로운 옛부터 도성을 세우더라도 반드시 이전 하는것은 아므로 왕이 근거 없는 말로 천도한다는 지적은 삼가하라고 지시했다. [1]
교하천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왕은 1613.1월 비변사에 비밀 전교를 통해 교하는 강화를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특이한 곳으로 성을 쌓고 가끔 순행하려고 하니 대신과 지관은 현장의 형세를 그려 오라고 지시했다.
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벌을 주어야 한다고 3달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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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조원석, 풍수지리 이론로으로 분석한 교하지역의 수도입지 적정성 연구,2016.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