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목
파주는 원래 고조선 지역으로 475년 고구려 장수왕때 술이홀현이 되었다가 1459년 세조 왕비인 정희왕후의 고향(내향)이라하여 원평부에서 '파주목'으로 승격됐다.[paki 2022년 8월 18일 (목) 11:49 (KST)]
개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파주는 지리적 위치와 지형적 특징으로 임진강 주변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충돌지역이었다.
파주는 원래 고조선 지역이었다가 고구려가 475년 백제 지역이었던 파주지역을 점령하면서 술이홀현 지명을 갖게 됐다.그후 서원현이 되었다가 1393년 서원군으로 승격되고 지금의 파평지역인 파평현을 병합하면서 1459.10.2일(음력) 파주목이 됐다.
파주는 북부지지역의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광주, 여주, 양주와 함께 경기도에 있던 4개 목중 하나이다. 파주목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파주군이 됐다.
행정구역
조선시대 파주목은 모두 12면(面)에 131개 리(里)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행정 관아는 주내면(州內面, 현 파주리) 지역이다. 당시 파주목의 행정 관할 구역은 오늘날의 파주읍, 문산읍, 법원읍, 조리읍, 광탄면, 월롱면, 파평면 지역을 포괄했다. [1]
지역 여건
파주지역은 50km 이상 임진강과 인접되어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임진강은 다른 지역의 강변과는 달리 강 양안에 높이 10m 내외의 수직 절벽이 발달해 있어 내륙을 연결하는 통로가 많지 않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영토 확보를 위해 대치했던 지역으로 임진강을 통과하기 위해 수심이 낮은 여울이나 나루터의 확보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적의 이동로를 감시하고 공격을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고대부터 임진강 이남 지역에는 칠중성, 육계토성, 월롱산성, 봉서산성과 임진나루의 진서문, 장산리 장산진보루 등으로 방어선이 구축됐다.
이 중 봉서산성은 「 신증동국여지승람」, 「 동국여지지」, 「 여지도서」, 「 대동지지」 등에 기록이 나타난다. 이 산성은 파주지역의 진산으로 임진강 남단 4km 정도에 213m 높이의 봉서산에 축조됐다.
또한 이 성은 성산고성, 파주고성, 마산고성으로 불렸으며 백제때 축조되고 조선 선조때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파주산성을 2차 방어 진지로 삼았다고 한다.
전략적 요충지로 가치가 높은 봉서산 주변은 자연스럽게 관아와 고을이 형성되었고 고구려가 475년에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도 행정의 중심지로 계속 이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지명 변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때 술이홀이라고 불리던 현 파주읍 지역을 중국신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현으로 바꾸어 '술이홀현'이 됐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봉성현으로 고치고 교하군 소속으로 두었다.
봉성이라는 지명은 술이홀의 한자어로 볼 수 있다. ‘술이’가 ‘수리’라는 뜻으로 ‘꼭대기〔頂〕’의 의미를 가지고 ‘홀’은 ‘들’ 또는 ‘벌’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들판의 성’이라는 뜻과 같은 의미가 된다. 봉성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들’이라는 뜻이므로 넓은 분지인 지형과 관련이 있다.[2]
고려 명종 왕 4년(1174)은 서원현으로 개칭하고 조선 태조 2년(1393) 서원군으로 승격됐다. 태조 7년에는 파평현을 병합하면서 원평군으로 개칭하고 8년후 원평도호부로 승격됐다.
세조실록18권1장(세조5년 10월2일경술)에 “庚戌 / 以慈聖王妃內鄕, 陞原平府爲坡州牧。(경술/ 이 자성왕비 내향, 승 원평부 위 파주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자성왕비의 내향인 원평부를 승격하여 파주목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세조5년(1459) 파평 출신인 정희왕후의 내향을 '목'으로 승격시키면서 '파주'라는 지명이 처음 만들어 졌다. 정희왕후의 내향인 파평은 고구려때 파해평사현, 액봉현, 영평현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파평 윤씨의 세거지였다. 원평도호부에서 목으로 승격할 당시 '원평목'이 될 수 있었지만 왕비의 내향인 파평을 우대한 것으로 보인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1455년 단종을 폐위하면서 왕비가 됐다. 1453년 계유정난때 거사 정보가 노출되자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 주면서 계획을 실행하게 했다고 한다.
계유정난 이외에도 정희왕후는 자신의 딸과 아들을 당대 실세였던 환확과 의정부대신인 정인지의 자식과 혼인시키는 등 세조가 왕이될 수 있도록 내조의 공이 많았다.
파주라는 지명은 파평(坡平)의 '파(坡)'에서 따왔고 큰 고을이라는 의미로 '주(州)'를 붙여서 만들어 졌다. 파평이라는 지명은 언덕이 많은 지역이라는 설과 이 지역의 산성이 있던 파평산(坡平山)과 영평산(鈴平山)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1895년 전국을 23개 부로 구획하고 종래의 부(府), 목(牧), 군(郡), 현(縣)으로 구분되어 있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시키면서 파주목이 '파주군'으로 바뀌었고 1996.3.1. 군 전체 인구가 15만 이상되면서 도농복합시인 파주시로 승격했다.
관아 조직
중종 때에 목사(牧使)·교수(敎授) 각 1명을 두었고 조선후기에는 목사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아전 32명이 있었다. 좌수와 별감은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유수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목사를 보좌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목사는 농업생산·호구관리, 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訴訟)·풍속 교정의 업무를 담당했다.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관아 시설과 이용
봉서산을 파주목의 진산으로 성산, 마산, 고봉성, 파주산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봉서산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었고 우물이 2개나 있었다고 한다.
파주목 관아의 건축물들은 봉서산 자락에서 ‘ㄱ’자 형태로 관아 건물들이 남북으로 늘어선 형태로 건축됐다. 관아 건물은 사직단과 동헌, 창고, 무기고, 풍계사우(豐溪祠宇 : 사당), 객사(客舍 : 전패 봉 안, 객관) 등 6개소가 있었고 향교(鄕校 : 교육기관)도 별도로 있었다.
동헌 앞 큰 문루가 있었는데 정면은 청각루, 후면은 은약루라는 현판이 쓰여 있었다. 이 문 은 개폐문으로 4곳에서 출입을 동시에 할 수 있었고 문 위 에는 한길이 넘는 큰 북을 달아 시각을 알렸다고 한다. 현재는 사라진 문 자리에는 동헌의 삼문이 있었다고 하여 삼문거리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로 고을 중심에 넓은 부지에 세워졌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는 정청과 좌우에 동익헌,서익헌이 있다. 왕이 능행을 하고 머무는 행궁 역할을 하던 파평관은 객사 북쪽에 위치하고 봉서당(鳳棲堂) 건물이 함께 있었다.[3]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세조6년(1460)부터 고종9년(1872)까지 파주목 관아에서 16번 유숙한 것으로 나타난다. 객사는 왕의 유숙뿐만 아니라 외국 사신이나 파견된 중앙 관리가 숙박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됐고 매월 초일과 보름날에 목사나 관원들이 모여 궁궐을 향한 망궐례 의식을 가졌다.
관아 시설의 변천
관아지 건축물은 1842년 7개소가 있었으나 1899년에는 49개 건축물로 늘어 났다. 관아지 건축물이 늘어 난 것은 철종대(1849∼1863) 이후 유숙자가 늘어나면서 신축 또는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관아에는 객사, 관풍루, 동헌 앞에 큰 문루가 있었고 객사는 1950년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파주시가 (재)한백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주어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는 현 파주초등학교, 구 파주읍사무소, 국군 제501 기무부대 일원을 관아터로 추정했다.
파주목 객사 복원자료 확보를 위한 '파주목 객사영역의 건축특징 학술고증연구 보고서'에는 1906년 광흥학원 건립된후 파주공립보통학교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파주목 객사를 교실로 사용한 것으로 추청한다.
당시 한일합방 직후 일제는 전국의 객사를 철거하려고 했지만 조선인의 반발로 신교육을 위한 학교로 전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후 파주국민학교가 있던 객사가 소실되면서 동헌 위치로 옮겨 재건됐다. 소실된 객사 부지에는 1953년 미1군단 CIC부대가 주둔하다가 한국군 기무부대로 이관됐다. [4]
현재까지 알려진 파주목 관아지의 부지규모는 객사였던 국군 제501 기무부대와 구 파주읍사무소가 72천여㎡이고 [5] 동헌이었던 파주초교 부지가 21천여㎡로 전체 93천여㎡(28천여평,금촌택지 C3블록의 2.2배)이다. 이외에도 연무정,사당, 무기고 등을 포함하면 10만여㎡ 이상의 규모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관아지 복원 추진
파주시는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파주목의 관아를 고증 및 복원하기 위해 2015년 '파주목관아터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했고 2016년에는 관아지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했다.
파주목 관아지 복원·정비는 고증 및 관련 시설의 철거·이전에 따른 협의가 필요하여 중장기적으로 추진한다. 전체 30년에 걸쳐서 추진계획 수립, 관련 기관 협의 및 토지매입, 시굴 및 발굴조사, 객사 또 건물터 복원, 동원 및 부속건물 복원 등 7단계로 추진하는 계획이다.[6]
2019년에는 관아지 복원을 위한 '파주목 객사영역의 건축특징 학술고증연구' 용역을 실시해 건물의 구조 및 규모를 제시했다.
관련 정보
파주 지명 탄생일 환산
'파주' 지명이 처음 만들어 진 세조5년 10월2일은 음력으로 1459.10.2일이다. 이 날자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459.10.27일(토)으로 2022.10.27일은 '파주'지명 탄생 563주년이 된다.
동헌앞 문루의 변신
1984년 발간된 '파주군사' 상권에 의하면 동헌 앞 정면 입구에는 '청각루(聽角樓)', 반대편에는 은약루(隱若樓)라는 현판이 달린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관헌 입구에는 대부분 누각이 있었지만 1938년 당시 송석하가 촬영한 '청각루' 현판이 달린 문루 사진 설명에는 '주내양반집 누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촬영된 문루 사진 안쪽의 가옥 사진에도 '주내양반집 대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일합방후 동헌 건물이 개인이나 유력자의 소유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주내 양반집 누각, 사진 송석하 / 1938년 주내 양반집 대문, 사진 송석하
문헌 및 참고
- 파주목 객사영역의 건축특징 학술고증연구
- 파주목 관아터 지표조사
- 2020,조선시대 파주 능행 및 파주목 행행 학술고증연구,경기대학교 사학과 연구팀
- 파주목 관아의 위치 추정과 공간구성 연구, 백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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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 파주목, 지명, 관아지, 객사, 고증,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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