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조선시대 국도1호선은 한양에서 광탄 혜음령을 넘어 한반도 북단의 의주와 연결되는 의주대로이다. 6.25 전쟁 이후 고양시 관산동과 금촌을 잇는 통일로가 국도1호선으로 변경됐고 남북교류의 핵심적인 통로가 됐다.
위치와 특징
조선조 의주대로는 해발 164m의 혜음령과 광탄 가좌미 고개를 넘어 임진나루를 잇는 산악지대에 위치 했다. 반면에 통일로는 의주대로 서편의 공릉천과 문산천을 따라 연결되는 평야지대의 도로이다.
현재 통일로는 통일대교와 연결되어 개성으로 이어지지만 고려 때는 탄현면의 낙하진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 김정호가 발간한 '대동지지'에 낙하진은 덕진하류에 있고 교하와 통하는 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낙하진은 서울과 개성간의 큰 길목으로 도승을 두어 관리하고 장단면 석곳리와 연결되어 있었다.[1]
통일로는 서울시 중구 봉래동2가 122-17 서울역에서 파주 진서면 어룡리 626 판문점까지 전체 연장은 57km이다. 공식적으로 국도 제1호선은 기점은 연신내역 사거리이고 종점은 임진각까지이다.
통일로 정비사업
6.25 전쟁후 2차선의 비포장도로로 이용되던 통일로는 1970년대 중국과 미국의 화해 무드에 맞추어 북한이 남북회담[2] 제안하고 남한이 부응하면서 통일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남과 북은 1971.9.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을 열어 서울과 평양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진행했다.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 지자 남한은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통일로를 확포장하고 도로변의 주택을 정비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통일로 확포장
서울 구파발부터 임진강 임진강 철교까지의 2차선 비포장 도로를 4차선으로 확포장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 공사는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았고 10개 업체가 분할해서 1971년부터 시작해 1972.3월 1년만에 완공했다.
이 당시 월롱면 위전리의 송강교 건설 공사는 완공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동절기에도 공사를 강행했다. 교각과 상판 콘크리트 공사시 교량 전체를 천막으로 포장하고 연탄불로 보온하면서 공사를 추진했다.
주택정비 사업
통일로 확포장과 함께 청와대는 파주군에 새마을 사업으로 통일로와 인접한 가옥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도로의 확포장 사업은 도로설계와 토지 보상등 사업기간이 오래 소요돼 다음해에 추진되었지만 주택정비사업은 단기간에 추진이 가능했다.
이에 따라 통일로 주택정비사업을 1971.6월부터 12월말까지 6개월만에 공사를 완료할 계획으로 추진하고 청와대와 중앙정보부는 수시로 공사 상황을 점검했다. 당시 가옥들은 6.25 전쟁후 버려지는 미군물자로 지어진 허술한 가옥이었다. 파주군은 지붕과 벽체를 슬레이트와 블럭 벽돌로 교체하고 새로 설치한 지붕과 벽체는 눈에 띄는 색상으로 도색하는 것으로 추진했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비가 불가한 주택은 철거하고 거주민은 이주 시켰다.
청와대는 당초 도로변 인접 가옥을 대상으로 주택정비사업을 추진하다가 도로변 가시 구역 가옥까지 확대했다. 사업량이 확대 되면서 파주군은 군청 공무원을 추가 동원하여 담당제를 추진했고 중앙공무원과 구분할 수 있도록 오렌지 색상의 모자를 착용하도록 했다.
이 당시 주택정비사업장에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내무부, 경기도 등 상급기관이 수시로 점검을 나와 작업 내용을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이중으로 작업 지시가 발생하면서 지붕이나 벽체를 2번 또는 3번까지 재도색하는 경우도 있었다.
통일로 확포장과 함께 노견에 은행나무를 식재하고 매년 코스모스를 가꾸면서 통일로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해 졌다.[3]
통일로 주택개량 사업
1979년 카터 미대통령의 방한과 남북적십자회담 추진을 계기로 종전 통일로 주택정비 사업과는 달리 기존 주택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 주택개량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1979년말까지 1년내 완료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1971년 당시 통일로 주택정비사업 담당했던 송달용 강화 부군수를 1979.2.1일자로 파주부군수로 전보 조치했다.
통일로의 주택개량 사업은 조리,금촌, 월롱, 주내, 문산 지역의 32개 부락 180가구가 해당이 됐다. 주택 개량은 20평, 30평, 35평 규모로 신축하는 것으로 융자금을 5년 거치 15년간 상환하는 조건이다. 모래와 시멘트는 파주군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방법이다.
사업의 연말 준공을 위해 공무원1명이 5주택을 담당하고 계장은 1개 부락, 과장 3개부락을 담당하는 체계로 운영했다. 담당 공무원은 부지 선택부터 주택융자 알선, 민원 문제 등을 해결해 주었다.
주택개량 세대 중 대출 자격이 부족한 가구는 건물을 감정평가하여 보상해 주고 이사를 시키는 방법으로 사업을 연말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군부대에서는 군협의 절차를 누락시켰다고 문제를 삼았으나 청와대에서 지시한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유야무야 처리됐다.
통일로 주택개량 사업은 전시 행정의 표본의 상징으로 평가하고 있다. 도로변에 주택들의 외관은 외국의 풍경과 다를 바 없지만 거의 모든 주택이 남향과 서향이라는 방식없이 통일로 방향으로 건축됐다.[4]
통일로의 변화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위해 1986년까지 전국 주요 국도에 도로공원을 가꾸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내무부가 주관했고 통일로도 조리 장곡소공원, 여우고개 내무부 꽃동산 등 곳곳에 공원이 조성됐다.
통일로에 조성된 공원은 파주군에서 관리했다. 도로변 관리에 대한 별도의 예산이 없던 시기라서 공무원이 구간을 부서별 나누어 매주 토요일에 도로변 청소와 제초작업을 담당했다.
통일로에 교통량이 늘어 나자 1993년에는 통일로 최초로 봉일천에 육교가 가설되고 시가지 도로처럼 신호등과 횡단 보도가 곳곳에 설치됐다. 최근에는 56번 도로,서울문산 고속도로 , 수도권 제2외곽 고속도로, 자유로 등 각종 간선도로가 통일로와 연결되면서 새로운 국도1호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파주위키 더보기
이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더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