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산 일제 개명론
현재 심학산의 지명은 일제가 식민지를 공고화 하기 위해 원래의 '심악산'을 의도적으로 고친 이름이다.
개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교하의 심악산(深岳山; 深嶽山)’ 이름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조선총독부가 1913년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 심학산(尋鶴山)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심학산'이라고 불린다..
2021.8월 정우진 상명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심학산’으로 개명한 것은 심악산의 경관구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풍수적 형국을 와해시키고 명당의 기운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창지개명한 것이라고 논문에서 밖혔다. [1]--paki 2024년 8월 9일 (금) 10:49 (KST)
지명 기록
심악산
심학산은 한강 하구에서 조망되는 특징적인 명산으로 자리하여 많은 자료가 옛 문헌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부터 ‘심악산(深岳山; 深嶽山)’ 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 편찬 된 지리지 및 승람류의 서지에서도 명칭이 변화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고문헌 가운데 심악산에 대한 가장 주목되는 기록은 국가에서 발간된 관찬사료로 심악산은 경기도 교하 일대를 대표하는 산악이자, 역사적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중요한 읍치로 기술된다.
관찬 사료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과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의 기록은 비교적 서 자세하게 나타난다.
심악산은 교하현 읍치 남쪽 21리 또는 15리의 지점에 있으며, 고봉산(208m)에서 뻗어 나온 산이다.. 고구려의 천정구현을 신라가 차지한 후 교하현이 되었고, 한때 보신향으로 명명된 적이 있다고 한다.
보신향은 다수의 지지자료에서 심악현의 전신으로 언급된 지명이다. 고려시대 에 이르러서는 양주에 소속된 심악현으로 이름을 알렸졌고 이때부터 ‘심악’이란 지명이 역사 속에 등장함 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는 현의 관아가 심악산 아래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읍치 배후의 진산 (鎭山)이 심악산 이었다는 것으로 풍수적 주산과 대부분 일치한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큰 규모의 읍치로 유지된 심악현이 폐지되어 일개 마을로 격하된다. 태조 3년(1394) 심악현은 고양에 예속되었다가 태종 14년(1414)에 심악·교하·석천(石泉) 세 고을이 교하로 통 통합되면서 폐현이 되었다.
이때부터 심악은 작은 고을로 축소되어 명맥을 유지되었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수막산
심악산은 조선 후기의 모든 문헌에서 일관되게 ‘深岳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을의 토착지명은 물을 막는다는 뜻의 '수막산(水幕山)’이 자주 거론된다.
'심악’과 ‘수 막’은 소리값이 유사하여 민간에서 불렀던 이명이었 것으로 보이고 문헌에서는 ‘수막’을 사용한 문인의 기록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문인 황세정(黃世楨) 은 선대 문인 구봉 송익필의 행적을 기록하며 '심악산' 을 ‘수막(水幕)’으로 명명한 바 있다.
'수막’이 송익필 이 머물며 학문을 닦았던 심악산을 가리킨 것이 분명 하므로, 당시 심악산을 ‘수막산’이라고도 달리 불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수막’은 글자 그대로 ‘물의 장 막’이란 뜻을 지닌다. 이에 대해서는 파주지명유래와 전설(1997)에 잘 나타난다.
“옛날에는 이 산 주위로 물이 흘러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한강 물을 막고 있다하여 수막산(水漠山)19)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내려와 홍수가 있을 때에는 한강 물과 조수물이 넘쳐 수막산이 물속에 잠겨 깊은 물에 들어갔다 하여 심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파주문화원, 1997: 346-347).”
심악산의 역사적 평가
조선시대에는 문인이나 명사들은 한강변에 경치가 좋은 곳에 집과는 별도로 별장(≒별서)을 짓고 정원을 가꾸면서 생활했다. 심악강이라고 불리는 심악산 강변에도 김제신과 송익필 등 많은 명사들이 별장을 운영한 기록이 있다.
심악산은 교하 일대뿐만 아니라 강 건너 통진과 상류 쪽으로 한참 떨어진 행주, 양화 일대 문인들이 설정한 8경이나 10경에 포함되어 있다. 심악산 경치를 포함한 시문은 호장십경(湖莊十景), 양한당팔경(養閒堂八景), 석탄정사팔경(石灘精舍八景), 양요당팔경(兩樂堂八景) 등이 있다.
김정리의 호장십경에는 한강변의 다른 산보다 유독 두드러지게 솟아 보여 가장 '어른의 항렬'이라 표현했다. 대동여지도에는 산에 대하여 삼각형으로 표식한 것과 달리 심악산만 유독 능선부터 봉오리까지 길게 그려져 있다.
광해군 4년(1612)에는 지관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국도 한양의 지기가 쇠했고 교하가 길지이므로 교하로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했다.일제 강점기에는 천자를 내는 명당이 있다고 하여 심학산 정상에 시신을 암장한 사건을 '조선전설급동화'에 게재하기도 했다.
근세에 들어서 청동기시대 대규모 고인돌군의 심악산에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07년 실시한 지표조사에 의하면 북방식 탁자형 고인돌 약 30기를 비롯하여 유물산포지 10개소, 바위 유적 2개소가 심악산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일제 지명 변경
개명 이유
일제가 '심악산'을 '심학산'으로 변경한 것은 식민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풍수적 사고를 와해시키고 지역 정체성을 퇴색시키기 위해 지명의 음가를 유지하면서도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도록 '심학산'으로 개명했다.
풍수적 형국의 와해
심악산은 '천자지지(天子之地)'와 '비룡상천(飛龍上天)' 등 명당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조선 시대 풍수지리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일본은 이러한 명당이라는 조선인의 인식을 차단하고, 심악산의 경관구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풍수적 형국을 와해시키려는 의도로 산명을 변경했다. '심악'이라는 발음을 '심학'으로 바꿔 음가를 유사하게 유지하면서도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었다(pk-심악산이름논문).
지역 정체성의 퇴색
심악산의 이름 변경은 단순한 지명 변경이 아니라, 심악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정체성을 퇴색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심악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며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으나, '심학산'으로의 변경은 이러한 역사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지역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도 지명 변경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개명 추진
'심학산尋鶴山'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일제가 만든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라는 제호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1913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의 ‘조선전설동화조사사항’에 따라 조선의 전설과 동화를 현지인의 구술 채록을 조사한 내용이다. 교하에서는 1건이 조사됐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곶면에 심학산(尋鶴山)이 있다. 산 정상에 잔디밭이 있는데 만약 이곳에 무덤을 쓰면 산이 울려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십여 년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
심악산의 이름이 1913년 처음 등장하고 심학산으로 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한·일병합 직후에 단행된 행정구역개편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부터 부·군의 폐합을, 또 동년 4월 1일부터는 면의 병합을 단행하였다.
이른 바 창지개명(創地改名)으로 회자되는 조선 지명의 파괴행위는 1914년 전국 행정구역의 축소 및 통폐합 과 정에서 본격화되었다. 부군면의 폐합은 기존 촌락 의 자치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지방에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수립하여 향촌민을 수월하게 통제·관리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지역민의 상황은 전혀 고려 되지 못한 강압적 조치였다.
심악산 지명은 1912~1919년 사이에 제작된 1:50,000 지형도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조선오만분일 지형도 ‘통진’ 도엽(1919년, 大正 8년 발행)에 나타난 심악산은 파주군 와석면에 소재하며, 심악산 주변으로 는 귀래동, 궁촌, 탑동, 신월, 통동 등의 부락명까지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조선오만분일 지형도가 1914년에 변경된 지명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산 이름이 ‘심악산’으로 명시된 점이다. 따라서 최소한 1919년까지는 산의 공식적인 명칭이 심학산으로 바뀌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심학산’이란 명칭이 신문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8년 <경성일보>의 기사에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심학산’으로 변경된 시기가 1919~1928년인 것으로 보인다.
심학산 지명유래 근거 비판
심학산은 조선시대 문헌 및 고 지도에서 그 명칭이 예외 없이 교하 ‘심악산’으로 나타 난다. 심악산의 한자명은 ‘深岳山[深嶽山]’이다.
일제 감점기에 만들어진 심학산 이름과 함께 궁궐에서 날아간 학 두마리가 발견된 산이라는 지명유래가 나타나면서 심학산으로 명칭이 점차 굳어 진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심학산이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산 또 는 선학(仙鶴)이 찾아드는 길지(吉地) 정도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숙종 때 궁궐에서 도망친 학 두 마리를 발견한 산이라 하여 심학산이 되었다는 이야기(파주문화원 1997, 347; 파주문화원 2009, 46)는 조선시대의 문헌에 발견되지 않아, 심학산으로 명칭이 변경된 뒤에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정보
소설 "심악산은 어디로 갔을까?"
소설은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에서 2021년에 발간한 상명 대학교 정우진 교수가 기고한 [한강하구 ‘심악(深岳)’ 문화지형의 형성과 해체] 논문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픽션이다. 이 글은 마을잡지 [디어교하] 2023년 겨울호에 게재되었고 저자는 '동글이'이다.
소설 내용은 일본의 학예관 카와나메가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심악산(深岳山)을 심학산(尋鶴山)으로 개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 카와나메는 상사로부터 교하 지역의 기운을 떨어뜨리라는 지시를 받으면서 심악산의 기운을 잠재울 방법을 찾으라는 특별 명령을 받는다.
카와나메는 심악산에 대해 조사하하면서 조선의 여러 문헌에서 심악산이 명산으로 칭송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욱이 심악산 주민들이 천자가 나올 명당으로 말하자 주인공은 산 이름을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다른 지역의 지명 변경 사례를 조사하고, 월악산(月岳山)을 월락산(月樂山)으로 바꾼 사례를 발견한다. 심악산에 학이 많이 서식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어 '심학산'이라고 개명해야한다고 총독부에 보고한다.
소설에서는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와 상징을 약화시키기 위해 풍수적 사상을 이용하려는 일본의 식민 통치 전략을 고발했다.
일제 지명 복구
곡릉천
조리읍에 있는 조선시대 예종 원비 능인 공릉(恭陵)에서 유래한 ‘공릉천’이 일제강점기에 곡릉천(曲陵川)으로 지명이 왜곡됐다.
파주시는 2008년 '곡릉천'이라는 명칭이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지도에서 처음 발견되고 하천이 굴곡이 많다는 '곡(曲)'과 왕의 ‘릉(陵)’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의도적인 역사 침탈이라는 이유로 원래의 "공릉천"으로 개명을 당시 국토해양부에 요청했다.
국토해양부는 2008.12.15일 국가하천관리심의위원회의에서 본래의 이름인 공릉천(恭陵川)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09.1.12일 관보에 게재했다. [2]
- ↑ 정우진 · 김일림, 한강하구 ‘심악(深岳)’ 문화지형의 형성과 해체 , 2021.8월
- ↑ 파주시청 블로그, 2009.1.12.https://m.blog.naver.com/paju_si/60060497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