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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발견되는 유물로 볼 때 오두산성은 대략 삼국시대 ~ 통일신라 시기에 처음 쌓아졌으며 고려 ~ 조선 시대까지 여러 차례 새로 쌓아지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관미성이나 고구려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지정학적인 가능성 외에는 관련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 확증하기 어려우며, 앞으로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견되는 유물로 볼 때 오두산성은 대략 삼국시대 ~ 통일신라 시기에 처음 쌓아졌으며 고려 ~ 조선 시대까지 여러 차례 새로 쌓아지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관미성이나 고구려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지정학적인 가능성 외에는 관련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 확증하기 어려우며, 앞으로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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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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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현재 정상에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가 들어서 있는 그 규모와 원형이 확인하 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고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북쪽절벽위에 약 10여m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대략 1.2km 정도로 삼국 시대의 성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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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리고 토사에 덮여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곳은 6곳 정도이다. 성벽은 해발 80∼100m 선을 따라 가며 축조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북 쪽을 윗쪽으로 하여 ᄀ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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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오두산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되고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 결과 일 부 보존이 잘되 남아있는 구간에서 어느 정도의 규모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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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되어지는 유 물은 삼국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土器), 백자(白磁), 기와(器瓦), 철촉(鐵 鏃) 등으로 발굴되어진 성과를 토대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구간을 보존 · 정비 하여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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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쌓기 수법을 보면 밖으로는 위로 올라가면서 돌을 안으로 들여 쌓고, 성벽 내부 는 돌로 채웠다. 이러한 성곽의 형태는 백제 성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관미성이 이 바로 오두산성이라는 주장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곳을 관미성이라고 기록해 더욱주목 받고 있다.<ref>의주길 스토리자원 조사연구 보고서, 경기문화화재단,2017년</ref>
    
==내성벽 발견==
 
==내성벽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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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내성벽.jpg|600px|내성벽]]
 
[[File:내성벽.jpg|600px|내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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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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