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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기록에 의하면 돈대는 모두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 성곽이고 숫자는 8개소였다. 크기는 1돈대에서 8돈대의 둘레가 39~176m로 다양하다. 제4돈대는 일부 돌로 쌓은 석축이 있다. 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고 높이는 3.6m이고 돈대로 들어가는 성문도 설치되어 있다.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기록에 의하면 돈대는 모두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 성곽이고 숫자는 8개소였다. 크기는 1돈대에서 8돈대의 둘레가 39~176m로 다양하다. 제4돈대는 일부 돌로 쌓은 석축이 있다. 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고 높이는 3.6m이고 돈대로 들어가는 성문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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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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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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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大東地志)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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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내용은 '2020, 조선시대 파주 능행 및 파주목 행행 학술고증연구 보고서' 288쪽에서 발췌한 내용이다.[paki 2022년 8월 15일 (월) 22:45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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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임진보(臨津堡) 임진(臨津)의 남안(南岸)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별장 (別將) 연강(緣江)을 설치하고 관성(關城)을 쌓았는데 좌우의 길이가 백 3십 3보이며 진서문(鎭西門)이라고 불렀다. 별장은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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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보(長山堡) 임진도(臨津渡)의 아래로 2리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보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백여 보이다. 또 돈대(墩臺)를 여덟 곳에 쌓았다. 별장은 한 사람이고 이상 이보(二堡)는 총융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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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방영(坊營) 영종 40년에 장단(長湍)으로부터 방영(坊營)을 본주로 이사했다. 병마방어사 한 사람이고 본주의 목사가 겸한다. 총융중영(摠戎中營)인조조에 설치. 총융우영(摠戎右營)이었는데 후에 중영(中營)으로 고쳤다. 속읍으로는 파주ㆍ고양ㆍ교하(交河)ㆍ적성ㆍ속보(屬堡)ㆍ임진ㆍ장산(長山) 등이다. 영장(營將)은 본주의 목사가 겸한다.<ref>2020, 조선시대 파주 능행 및 파주목 행행 학술고증연구 보고서' 28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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