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2 바이트 제거됨 ,  2022년 8월 18일 (목) 14:30
잔글
59번째 줄: 59번째 줄:  
동헌 앞 큰 문루가 있었는데  정면은 청각루, 후면은 은약루라는 현판이 쓰여 있었다. 이 문 은 개폐문으로 4곳에서 출입을 동시에 할 수 있었고 문 위 에는 한길이 넘는 큰 북을 달아 시각을 알렸다고 한다.  현재는 사라진 문 자리에는 동헌의 삼문이 있었다고 하여 삼문거리라고 불렸다.
 
동헌 앞 큰 문루가 있었는데  정면은 청각루, 후면은 은약루라는 현판이 쓰여 있었다. 이 문 은 개폐문으로 4곳에서 출입을 동시에 할 수 있었고 문 위 에는 한길이 넘는 큰 북을 달아 시각을 알렸다고 한다.  현재는 사라진 문 자리에는 동헌의 삼문이 있었다고 하여 삼문거리라고 불렸다.
   −
조선시대의 객사는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로 고을 중심에 넓은 부지에 세워졌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는 정청과 좌우에 동익헌,서익헌이 있다. 왕이 능행을 하고 머무는 행궁 역할을 하던 파평관은 객사 북쪽에 위치하고 봉서당(鳳棲堂) 건물이 함께 있었다..
+
조선시대의 객사는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로 고을 중심에 넓은 부지에 세워졌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는 정청과 좌우에 동익헌,서익헌이 있다. 왕이 능행을 하고 머무는 행궁 역할을 하던 파평관은 객사 북쪽에 위치하고 봉서당(鳳棲堂) 건물이 함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세조6년(1460)부터 고종9년(1872)까지 파주목 관아에서 16번 유숙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세조6년(1460)부터 고종9년(1872)까지 파주목 관아에서 16번 유숙한 것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