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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렸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 하자는 상소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교하 지역은 백제때 ' ‘천정구(泉井口)’로 불렸고 통일신라 757년 행정구역 개편때 '교하군'으로 개명됐다. 1612년 교하로 천도 하자는 상소 당시는 현재의 교하지역과 탄현·월롱·금촌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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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군의 행정을 관할하는 읍치는 현재 파주 장릉이 있는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다.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으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1731년 갈현리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이곳에 있던 교하군 읍치는 금촌으로 옮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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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군의 행정을 관할하는 읍치는 현재 파주 장릉이 있는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다.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으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1731년 갈현리로  이전됐다. 이에 따라 이곳에 있던 교하군 읍치는 금촌으로 옮기게 됐다.
    
역술관 이의신이 교하 천도를 주장한 위치가 교하리 또는 갈현리 주변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운천리에 있던 장릉이 120여년 후에 갈현리로 이장됐다. 왕의 묘지를 다시 옮길 때는 길지를 선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술관 이의신이 교하 천도를 주장한 위치가 교하리 또는 갈현리 주변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운천리에 있던 장릉이 120여년 후에 갈현리로 이장됐다. 왕의 묘지를 다시 옮길 때는 길지를 선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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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천도 상소를 올린 시기에  교하군 읍치가 있던 곳은 갈현리이다. 이곳에 대한 풍수는 장릉을 이전할 때 왕에게 보고됐던 기록에는 길지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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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천도 상소를 올린 시기에  교하군 읍치가 있던 곳은 갈현리이다. 이곳에 대한 풍수는 장릉을 이전할 때 왕에게 보고됐던 기록에 남아 있어 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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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록에는 한북정맥에서 분맥한 오두지맥이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고 있는 월롱산에 산맥의 지기가 모여 갈현리로 내려와 이 곳은 강한 기를 갖고 있는 용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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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록에는 한북정맥에서 분맥한 오두지맥이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고 있는 월롱산에 산맥의 지기가 모여 갈현리로 내려와 이 곳은 강한 기를 갖고 있는 용맥이라 했다.   
    
이와 함께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이 있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이와 함께 문산천과 공릉천이 호위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이 있어 용절이 웅위하고 내맥이 있어 그동안  왕의 장지로 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