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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벌을 주어야 한다고 3개월 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ref>1617년 음력 4월20일 1번기사 참조</ref>
 
왕의 비밀 전교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반대했고 이의신을 벌을 주어야 한다고 3개월 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의신이 국가를 위해 이궁을 창건하자는 뜻이라고 한 발 물러 섰지만 결국 교하 천도는 무산됐다.<ref>1617년 음력 4월20일 1번기사 참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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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천도론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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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석(서경대학교 경영문화대학원 )은 논문에서 광해군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 정씨 왕조설에 대한 소문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 방안으로 천도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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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신이 상소를 올리기 전부터  '일한이하삼강사해(一漢二河三江四海)'라는 유언비어가 유행했다. 이 내용은 도읍이 이전한다는 내용으로  처음은 한양이고, 두 번째는 교하를 말하며, 세 번째는 강화, 네 번째는 해풍이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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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언비어는 교하 천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된 것으로 추정하면서 광해군이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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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 저자는 당시 교하군 지역에서도 천도 지역을 교하리보다 갈현리를 도성 위치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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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현리는 개명지맥(일명 오두지맥) 일부로 고양시 개명산에서 이어 온 기세가 광탄  됫박고개와 월롱산을 지나고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길지라고 보았다. 교하리는 수세가 좋으나 감악지맥의 웅고한 산들이 이 지역을 압도하는 형국이라 관청이 들어설 자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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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저자는 풍수적으로 산세, 수세, 국세로 볼때 교하가 수도의 권부가 자리하기에는 산세가 작을 뿐만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이어서 대홍수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다만, 파주 지역중 감악지맥의 웅고한 산을 후룡으로 하여 배산임수가 갖추어진 광탄면 일대와 조리읍 일대가 적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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