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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때 다리가 낡아 다리  위에 문짝을 깔아서 건너게 했다고 해서 '널문교'라는 이름이 생겼고 마을 이름도 널문리로 됐다.
 
지명유래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때 다리가 낡아 다리  위에 문짝을 깔아서 건너게 했다고 해서 '널문교'라는 이름이 생겼고 마을 이름도 널문리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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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았다는 설과 널문다리가 있는 곳이다. 이와함께 지형이 넓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넓은리 → 널븐리 → 널문리로 변천되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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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았다는 것과 함께 지형이 넓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넓은리 → 널븐리 → 널문리로 변천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와함께 휴전회담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널문리 한자 표기를  '판문점'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지명이 굳어 진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회담장소가 널문리로 결정되기 이전부터 판문점(Panmunjom)이라는  명칭이 회담 기록에 나타나고 1883년 '연원직지'에 판문점(板門店)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한국전쟁 이전 조선시대부터 널문리 길목에 있던 주막마을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있다.
 
이와함께 휴전회담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널문리 한자 표기를  '판문점'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지명이 굳어 진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회담장소가 널문리로 결정되기 이전부터 판문점(Panmunjom)이라는  명칭이 회담 기록에 나타나고 1883년 '연원직지'에 판문점(板門店)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한국전쟁 이전 조선시대부터 널문리 길목에 있던 주막마을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있다.